비오는 날 버스 안이다. 앞사람의 주머니에서 흘러내릴 듯한 지갑이 보인다. 반쯤 나온 지갑은 버스의 진동에 우회전에 결국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온다. 주인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엔진 소리와 차창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지갑이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묻힌 까닭이다.
“저기요. 지갑 떨어졌어요.”
좌석 앞뒤로 살피더니 자신의 지갑을 줍는다.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요새는 고맙다 해야 할 것에 고맙다 말하지 않는 게 표준인 것 같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부디 가까운 미래에 저 지갑이 몇 번 더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빈다.
내릴 때가 되어 여럿이 함께 뒷문에 선다. 나는 오른쪽의 공간을 선택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버스가 멈추고 뒷문이 열린다. 땅에 발이 닿기도 전에 왼손을 왼뺨으로 가져간다. 오른쪽에서 내린 사람이 빗물 묻은 우산을 위로 활짝 펼쳤다. 예상이 적중했다. 어딘가에서 나올 때 우산을 아래로 펼치는 인간은 별로 없다. 오늘 안으로 저 인간이 지나가는 자동차가 일으킨 물벼락에 흠뻑 젖기를 바란다.
지하로 들어선다. 백화점 입구를 찾아간다. 백화점에 들어설 때도 정신을 잘 차려야 했다. 앞뒤로 누가 있는지 잘 살펴야한다. 뒤로 둘이 걸어오고 있다. 아무나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출입문에서는 문지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첫 번째 외부 문을 통과한다. 뒤따라 걸어오는 이를 위해 문을 잡아둔다. 당연히 내가 잡아놓고 있는 문을 건네잡지 않는다. 그가 문을 적당히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던 터라 그와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 곧이어 두 번째 문이다. 손잡이를 잡아민다. 내 몸을 대각선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큼만 열었다가 바로 놓는다. 뒤를 본다. 반쯤 성공했다. 그가 닫힌 문을 어깨로 밀며 나를 흘겨보고 있다. 그가 문에 끼지 않았으므로 반쯤 실패하고 만다.
화장실에 들린다. 볼일을 본 후,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 앞으로 향한다. 세면대에는 나보다 먼저 온 이가 하나 있다. 이 인간도 결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허리를 펴는 것을 보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선다. 그는 수영장에서 막 빠져나온 개처럼 손을 털어댔다. 미리 대비한 나 자신을 칭찬한다. 곧이어 양손을 모아 오목하게 만들까 잠시 고민했다. 뒤로 돌아나가는 그의 바지 엉덩이에 물을 모아 뿌리려다가 참는다.
내일은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야겠다. 세상은 너무나 위험하다. 편집증이나 신경과민증이 자연발병할 위험성을 내포한 그런 곳이다. 세상에는 고마운 것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자신이 당하면 거품 물고 역정을 낼 만한 행동을 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오늘 지갑을 줍게 해줬음에도 고맙다 하지 않은 인간, 빗물을 뿌린 인간, 붙잡아 놓은 문을 미끄러져 들어오기만 한 인간, 손에 묻은 물을 털어내며 튀긴 인간의 손등에 ’참 잘했어요’ 대신 무례배(無禮輩) 도장을 찍어주고 싶었다. 속마음이 이렇다고 해서 내가 파시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사소절(四小節)을 바랄 뿐이다.
사소절(士小節):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에 관하여 1775년에 저술한 수양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소절)]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