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차 안에서 옷을 벗었다
타이타닉 II
온몸이 온기로 가득하다. 아니 열기라고 해야 더 맞겠다. 내 몸의 모든 조각들, 세포들이 열려 땀방울이 맺히다 못해 속옷까지 다 적셔 버렸다. 머리에서도 김이 났는지 쓰고 있던 모자 꼭대기에 하얀 서리가 맺혀 있다. 땀이 흐르고 흘러 모자 밖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까지 다 젖었다.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움직였는가. 앞 뒤로 함께 하는 호흡에 힘입어 정말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뜨거워진 몸에서 김이 나고, 남편의 입김, 나의 입김이 거칠게 뱉어져 나와 차 창문이 뿌옇게 흐려졌다. 선팅이 된 데에다 밖의 영하 날씨와의 온도차로 창이 흐려졌으니 안이 보이진 않겠지, 하며 겹겹이 끼어 입은 옷을 하나씩 벗는다. 몸이 식기 전에 어서 젖은 옷을 벗어야 한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 일이니.
한 덩치 하는 남편과 우리 SUV 뒷좌석에서 그러고 있으니 삼 남매가 앉던 공간이 매우 좁게 느껴진다. 브라까지 다 젖었지만 내의만 보송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속옷까지 거기서 다 갈아입는 건 오버다. 상의는 그럭저럭 입었는데, 하의가 좀 어렵다. 다리가 긴 편은 아니지만 바지와 내의까지 갈아입어야 하니 다리를 어디로 뻗어야 하나, 옷을 벗으며 궁리한다. 나도 나지만 몸이 두껍기도 한 남편은 연신 씩씩, 낑낑댄다.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오늘도 해냈다는 성취감과, 뜨거워진 몸을 오롯이 느껴보니 기분이 썩 괜찮다.
영화 타이타닉 중("Movie Tube"에서)나의 몸과 그의 알몸을 번갈아 보다 차 창이 뿌옇게 흐려진 것을 보니 불현듯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케이트 윈슬렛처럼 나도 뿌연 차 창을 요염하게 쓸어내려 볼까. 고등학생 때 극장에서 그 장면을 보며 야한 정사신보다 더 섹시하고 세련되다 생각했다. 언젠가 카메론 감독이 트위터에 썼다고 읽었는데, 소품으로 사용했던 그 자동차에는 여전히 여주인공, 로즈의 손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의 위엄과 촬영 당시의 추억을 간직하려는 것처럼. 나도 우리 차 창에 손자국을 남겨 볼까 하는 찰나, 남편이 왜 웃냐고 한다. 어머, 웃음이 밖으로 나왔나?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배 고프다" 라며 엉뚱한 소리로 덮어버렸다.
얼른 환복을 하고 콩나물 해장국을 먹으러 가야 한다. 사람들이 기다리니. 우린 그들과 일요일 새벽 06:30에 만나 달리기를 한다. 남편 따라 얼떨결에 시작한 마라톤의 재미가 쏠쏠하다. 뛰고 오면 피곤해서 다시 자야 하는 부작용이 아직 있지만, 뛰는 동안 샘솟는 에너지가 머리에 꽃을 단 것 마냥 기분을 좋게 만든다. 나도 대회에서 멋지게 달리고 싶다는 희망과 함께.
남편과 옷을 갈아입고, 모자는 다시 푹 눌러쓴 채 식당에 들어갔더니 동호회 가족들이 식당 한쪽을 잔뜩 메우고 앉아 계신다. 다들 어쩜 이리 빠르시지? 우리도 씩씩거리며 열심히 갈아입었는데. 왜 이리 늦었냐고 타박도 하신다. 하여튼 부부는 둘이 어디 보내면 안된다시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차 창을 쓸어내려 볼까 했던 내 마음이 생각나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배시시 웃으며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는 뚝배기를 받았다. 구운 김이 있는 걸 보니 콩나물을 싸 먹으라는 것 같다. 젖은 국에 김을 담가 콩나물과 풀린 계란을 싸 먹어보니 감칠맛이다. 속이 뜨끈해지니 몸이 노곤해진다.
잭과 로즈가 자동차 안에서 눈이 맞았다학창 시절 달리기 하던 때가 아득해 달리다 무릎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세 아이를 출산했으니 칼슘이 부족해 뼈라도 다치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겁이 난다. 하지만 시작을 해봐야 계속할 수 있을지, 나와 맞는 운동인지 알 수 있다. 혼자서는 지속이 어려울 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큰 힘이 된다. 그분들 덕분에 오늘도 혼자서는 상상도 못 했을 거리를 아주 오래, 또 멀리 달렸다. 두 줄로 서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앞 뒤로 함께 하는 호흡에 힘입어 정말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무리에 끼어 절대 무리를 해서는 안된다 물론.)
사진: 구글, 유튜브에서 캡처(저작권 있을 수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