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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을 읽는 100가지 방법

36. 배신을 대하는 자세

by 제이오름


01.jpg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샬롯의 여인 (The Lady of Shalott). 1888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이성과 감성』을 통해 배신 이야기를 하기 전에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한번 보려고 한다. 존 윌리엄 워터 하우스의 <샬롯의 여인>라는 그림이다. 원래 샬롯의 여인은 영국의 전설인 아더왕 전설에 나오는 여인이다. 영국 낭만주의 대표 시인인 테니슨(1809-1892)은 관련 이야기를 배경으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랜슬롯 경에 대한 짝사랑으로 죽은 엘레인에 대한 중세 아더왕의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엘레인은 카멜롯 근처의 성에 갇힌 채 태피스트리를 짜며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저주를 무시하고 창밖을 내다보고 랜슬롯을 보게 된다. 이때 거울은 깨어지고 태피스트리는 땅에 떨어졌다. 자신이 죽을 거라는 것을 알게된 엘레인은 작은 배로 타고 카멜롯으로 향한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랜슬롯 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워터하우스의 그림은 샬롯의 여인이 배의 사슬을 풀고 출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며, 성에 갇혔을 때 그녀가 짠 태티스트리가 배에 걸쳐져 있다. 자세히 보니 그녀 앞에 십자가, 세 개의 촛불이 있는데, 이중에 두개는 꺼져 있다. 꺼진 두개의 촛불이 이제 죽을 그녀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 하다. 그림은 엘레인 자신의 운명과 욕망에 의한 배신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이성과 감성』의 후반 이야기를 감안하면 메리앤은 엘레인처럼 비극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지만 메리앤이 윌러비에게 마지막 편지를 받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을 때 그녀가 받은 상처는 엘레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이성과 감성』에서 윌러비가 메리앤에게 보낸 편지를 배신의 관점에서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자 한다.


메리앤 양 앞

방금 당신의 편지를 받았으며 편지를 주신 데 대해 전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바입니다. 어젯밤의 저의 행동에 당신의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 혹 있었는지 차마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린 점이 있다는 것에 너무나 당혹스러우며 전혀 제 본의가 아니었음을 말씀드리오니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데번셔에서 당신의 가족과 알고 지내던 것을 생각하면 늘 감사하고 기쁠 따름이며, 그것은 설혹 제가 무슨 실수나 오해를 저지르더라도 깨지지 않을 거라고 자위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가족 전부에 대한 제 존경은 정말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가 느끼던 이상의, 혹은 표현하고자 했던 것 이상의 어떤 믿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면, 그런 존경을 표현함에 있어 좀더 조심했어야 하지 않았나 자책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저의 사랑이 오래전부터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이제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이 언약이 실현될 것임을 아시면 충분히 이해되실 것입니다. 무척 섭섭하지만 저한테 영예스럽게도 보내주셨던 편지들을 돌려달라시는 명령에 복종하는 바이며, 아울러 저한테 그토록 고맙게도 베풀어주신 머리카락도 돌려드리는 바입니다.

당신의 보잘것없는 종복

존 윌러비 드림


이 편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과연 이 편지가 헤어지는 연인으로서 예를 다해서 쓴 편지인지, 그 내용은 진심을 담은 사과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다. 얼핏 보면 표면적으로 정중하고 예의있게 보일 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메리앤과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고 단절을 선언하고 있다. "편지를 보내주신 데 대해 심심한 감사" 표현은 매우 형식적인 문체로서 메리앤에 대한 감정의 단절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녀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젯 밤 행동에 책망을 받을 것이 있었는지 걱정스럽다"는 말은 형식적인 사과에 불과하고 자신은 별 잘못이 없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린 점이 있다면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도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끝까지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려는 의도로 보일 뿐이다. 메리안의 고통보다 자기 면책에만 급급해 보인다. 데번셔에서의 친분은 설혹 "무슨 실수나 오해를 저지르더라도"의 말은 자신이 한 행동은 그저 가벼운 실수 정도로 축소하려는 의도이다. "제가 느끼던 이상의, 혹은 표현하고자 했던 것 이상의 어떤 믿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면"은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이다. 그 모든 책임을 메리앤에게 돌리는 말이며, 자신의 명예는 지키면서 그녀와의 감정적 의미를 모두 지워버리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럴 뜻이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은 너가 오해한것 뿐이야'라는 의미를 타나내는 것이다. "저의 사랑이 오래전부터 다른 곳에 가 있었고..."는 배신의 핵심 문장이다. "오래전부터"라는 말로 메리앤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부정하고 자신의 변심을 과거부터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 말에서 메리안의 감정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언약이 실현될 것임을"에서 윌러비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약혼 사실을 통보하고 있는데, 따뜻한 감정이 아닌 건조한 투로 사실을 통보하고 있다. 얼마나 잔혹한 말인가. 그동안 메리앤에게 한번도 친절하게 설명한 적도 없이 자신이 이제 곧 부유한 여성과 결혼한다는 결정적 선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메리앤의 편지와 머리카락을 돌려보내는 행위는 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상징하는 선언이다. 메리앤과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말의 흔적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당신의 보잘것없는 종복"이라는 말은 과장된 겸손 표현으로 문체적 공손함을 가장한 냉정함을 내포하고 있다. 형식적 예법에 의존하여 감정적 책임을 피하는 마무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를 읽자마자 메리앤은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겉으로는 예의를 갖춘듯 하나 책임회피, 자기합리화의 나열 뿐이다. 이후 메리앤은 병으로 쓰러진다.


이 따위의 편지를 읽고 대시우드 양이 얼마나 큰 분노에 사로잡혔는지는 상상에 맡겨도 좋을 것이다. 읽기 전부터 마음이 변했음을 고백하고 영원히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있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언어를 동원하여 막 나가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윌러비가 명예롭고 섬세한 감정을 이렇게 모른 척하고 나올 수 있을 줄도 짐작하지 못하였다. 신사라면 지켜야 할 예의범절과도 완전히 담을 쌓고 이렇게 뻔뻔스러우리만치 잔인한 편지를 보내다니, 놓여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입에 담기는 커녕 신의도 전혀 깬 적이 없고 어떤 종류든 특별한 애정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한 줄 한 줄 마다가 모욕이었고, 쓴 사람이 아주 개망나니 악당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240)


66d65e1e1287d2738276.jpg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1852. 테이트브리튼 미술관



그러나 메리앤은 배신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성숙한 방식으로 극복해 낸다. 감정의 폭풍을 겪고 난 뒤, 자신이 과한 감정 표현과 낭만적 환상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천천히 자기성찰을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엘리너가 자신에게 했던 조언들을 떠올리며 사랑에 있어서는 감정뿐만이 아니라 이성과 책임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성적 절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등을 배우면서 내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관계를 재정립하고 사랑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다 보니, 그동안 털끗만큼도 들어오지 않았던 브랜든 대령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브랜든 대령은 메리앤에게 진심과 인격적 존중을 보여주었던 사람이고, 그를 통해 메리앤은 사랑은 "강렬한 감정"보다 상호 존중과 배려, 이성적 절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과거를 생각해 보았어. 지난 가을 그이하고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이래로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켜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야박한 짓의 연속이었어. 나 자신의 감정이 내 고통을 예비했던 거싱고 그런 고통을 겪으며 꿋꿋하지 못했던 탓에 거의 무덤으로 갈 뻔했던 거야. 내 병은 나 자신이 자초했다는 걸 나도 잘 알았지. 건강을 너무 소홀히 해서 그 당시에도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다니까....최근에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하면서 안달볶달했고, 마음속에 어떤 불평불만이 가득 차 있었는지를 다 알고 있는 언니가 아니냐 말이야! 언니의 기억 속에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되었을까! 어머니도 그렇지! 언니가 어떻게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표현도 못하겠어. 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보였어. 무두가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어. 제닝스 부인의 친절, 끊임없는 친절을 나는 배은망덕한 경멸로 갚아주었지. 미들턴 부부, 파머 부부, 스틸 자매, 그냥 아는 모든 사람들한테도, 난 무례하고 부당했지. 그들의 미덕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 걸고, 그들의 관심에 대해서는 짜증을 내면서 말이야. 존한테, 패니한테....그래, 그 사람들한테조차, 자격이야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받아야 할 대접조차 해주지 않았어. 그러나 언니...누구보다도 언니가, 어머니보다도 더, 나 때문에 쓰라림을 겪었지..."(459-460)


메리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윌러비와의 일을 계기로 얼마나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자연스레 느껴진다. <심연으로부터>라는 책에서 "가장 깊은 상처는 우리가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서 온다. 우리는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사람들에게 상처받는다"고 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메리앤은 자신이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기에 그 상처가 컸었다. 극복하는 과정이 매우 힘들고 어려웠지만, 엘리너와 브랜든 대령의 도움으로 잘 이겨낼 수 있었다. 메리앤의 말은 우리가 삶에서 배신을 겪었을 때 어떻게 이겨내고 극복해야 하는지 그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다른 그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만남>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예술가와 그를 후원하는 후원자와의 만남,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림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가 마냥 친밀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개를 치켜 들고 후원자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자세는 다소 오만해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후원해주었던 자신의 후원자를 배신하고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아닐까. 이런 경우라면 그것은 후원자에 대한 배신이 될텐데 말이다. 후원자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그것을 받아들일까.


image_readtop_2016_89135_14542862962338951.jpg 귀스타브 쿠르베. 만남(안녕하세요, 쿠르베씨).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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