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었어.
어니스트가 밥값을 주려고 내려왔다가 부장이 없는 것을 보자, 박기사에게 건네주었어. 박기사는 이층에서 내려온 과장에게 그걸 주었고.
- 이따가 부장님 오면 드려.
과장은 다시 내게 밥값을 주었어. 그는 나이 어린 부장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어. 본인이 점심값을 받으면 반드시 부장에게 건네주었고. 나이순인가, 짬밥 순인가. 어느 것이 옳은가. 사람을 줄 세우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인데. 한국어는 존댓말이 발달한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때 배웠나. …그때는 몰랐지. 수직적인 인간관계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리라는 것을. 외국인이 보았을 때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것을. 설마 세종대왕님이 그러셨을 리는 없고. 유교문화권이라 그런가. 라틴어처럼 평등을 위주로 한국어가 만들어졌다면 좋았을 것을.
얼마 후 내가 밥값을 내밀었을 때 부장은 싱겁게 웃었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어. 몇천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조상들과 다름없이 살고 있었어.
- 어차피 아무나 내면 되지.
부장이 먼저 앞장서서 걸으면 다들 뒤를 따라 걸었어. 부장이 추어탕 집으로 방향을 틀면 추어탕집으로 가는 것이었고, 밀양식당으로 틀면 거기로 가는 것이었지. 물론 부장이 걸음을 옮기다가 어디로 갈까, 물어보기는 하지만 그건 부장 마음이었어. 일할 때도 그랬지. 다른 기사들이 힘들게 물건을 다 실어놓으면 부장은 거드름을 피우며 공구 같은 것을 챙겨 짐을 제대로 실었는지 확인하고 탔어. 어쩌다 물건을 같이 싣고 밧줄을 같이 묶기도 했지만. 하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어. 누리지 못하는 데 굳이 높은 자리에 누가 오르려고 하겠어. 혼자 속으로 생각하다가 생각이 막히네. 나는 여러모로 부족하지. 지금까지도 부족해서 어른들 잔소리를 들었고, 어른이 된 지금도 누군가의 잔소리나 도움이 필요하고.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써 놓으면 꼰대라고 할까. 아마 그럴 거야.
이번에는 추어탕집이었어. 셋이 앉아 있는 동안 부장은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나와 과장에게도 한 잔씩 따라주었어. 아, 그전에 과장에게는 흔들지 않고 맑은 것만 따랐어. 나도 흔들지 않은 것을 먹고 싶었지만 부장은 내게 물어보지 않고 마구 흔들었어. 그런 뒤 내게도 막걸리를 따라주더군.
그런 다음 부장은 반찬 냉장고로 갔어. 그는 반찬을 접시에 담아 하나씩 식탁으로 날랐어.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지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 오십 대 후반의 여주인은 혼자 고기를 볶거나 생선을 굽는데 바빴으니까. 육십 대 초반이었나, 그것은 기억나지 않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부장은 누군가 뒤따라 했으면 바라서 그랬는지도 몰라. 한 번씩 짜증 섞인 얼굴을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도 쉬고 싶었어.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고 싶었어. 그래서 한 번씩 부장이 하던 일을 대신하기도 했어. 뭐 부장이 그 일을 그만두어도 되었을 거야. 그런데 한번 시작한 것을 그만두지 못했어. 어쩌면 부장이 나를 선임하사라고 부르는 건 이런 것도 관련이 있을 거야. 졸병이면 졸병답게 굴라는 것이지. 그런데 여기는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추어탕집 여주인은 음식 솜씨가 있었어. 원하는 게 있으면 아무거나 해주었고. 미리 주문받았다가 다음 날 해주기도 했어. 물메기탕을 해주기도 하고, 동태탕을 해주기도 하고. 양이 많게 돼지고기볶음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날은 뭔가 이상한 날이었어. 평소답지 않게 여사장 친구들이 서빙을 도왔지. 한 번씩 들러서 놀다 가는 사람일지도 몰라. 부장은 반찬을 담지 않고 막걸리를 먼저 따랐어. 돼지고기볶음이 담긴 프라이팬이 중간에 놓였을 때 박기사가 갑자기 숟가락을 홱 던졌어. 어른이 할 짓이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어. 아무리 밥상에 불만이 있어도 육십이 넘은 홀아비 영감이 문을 박차고 나가다니.
- 따라 나가 봐!
부장의 말에 내키지 않았지만 영감의 뒤를 따랐어. 멀리 화가 난 영감의 육중한 몸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어. 벌써 지하철 입구였어.
- 무슨 일입니까?
영감이 휙 돌아보았어. 오랜 세월 햇빛이나 바람에 절여졌겠지만, 영락없는 어린아이 얼굴이었지.
- 저번에도 내가 한번 봤어. 식은 밥 푸는 거 말이여. 오늘도 내가 서빙하는 그 아줌마한테 왜 식은밥을 주냐고 그랬지.
- 그랬더니요?
- 아니라고 그래. 내가 몇 번이나 물었어.
- 아, 그래도 갑시다. 이대로 가면 됩니까?
- 아, 뒤에 조은집이 있어. 거기 좋더라고. 깨끗하고.
나는 몇 번 말리다가 그만두었어. 그새 영감은 벌써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어. 나는 더 말리지 않고 식당으로 돌아와서 소식을 전했어.
- 식은밥 푸는 것을 봤는데, 안 봤다고 우겨서 그냥 간답니다.
밥을 퍼주었던 여사장의 친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어. 몇 번인가 식당에 놀러 와서인지 낯이 익었어. 여주인은 아무 말이 없었고 주위가 조용해졌지. 부장과 과장 두 사람은 말이 없이 숟가락질하고 있었어. 내가 뭐 이런 일 가지고 숟가락을 던지고 가느냐고 말하고 싶어졌을 때 부장이 말했어.
- 전에도 한번 우리한테 딱 걸렸거든.
그 말에 나는 움찔 놀라 입을 다물었어.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다들 숟가락질했어. 좀 깨끗하지 못한 게 흠이었지만 여주인이 차려내는 음식은 좋았지. 몸을 움직여 일해야 하는 중고 철거판매상에서 일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식사를 제공하기 어려웠고. 자주 다니는 식당을 생각해 보아도 그랬어. 이보다 더 잘 먹기는 쉽지 않았어. 밀양식당의 정식도 좋고, 마늘갈비탕집도 맛있었지만 몇 번 먹으면 고를 게 없었어. 추어탕집이 우리에게는 딱이었던 거지. 게다가 전라도가 고향인 여주인의 음식은 맛깔스러웠어. 흠이라면 식탁이나 바닥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었지.
먼저 식사를 마친 부장이 계산을 하고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보였어. 내가 수저를 놓았을 때 과장은 신문을 집어 들었어. 내가 밖으로 나오자, 부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과장은 곧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낼 것 같았고.
작업장에 도착하니 영감이 먼저 돌아와 있었어.
- 그 집 깨끗하고 먹기도 좋아. 6천 원밖에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