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
은퇴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마음이 맞든 맞지 않든 함께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회식 자리에 내키지 않아도 참석해 인사를 나누어야 했고, 조직 분위기에 따라 내 생각을 드러내지 못할 때도 많았다. 특히 젊었을 때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보수적인 윗세대의 문화에 조심스레 맞추어야 했다. 내 성격이 소극적인 탓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자주 떠올랐다. 두 분 모두 이미 돌아가셨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개방적인 분들이셨다. 어머니는 기름 장사, 보따리 장사를 하던 분들이 집에 오셔도 우리 식구와 같은 상에 앉혀 함께 식사를 하게 하셨다. 손님들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도 기억난다. 아버지는 몸이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부엌에 들어가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셨다. 우리 목욕을 시켜 주시거나 떨어진 옷을 손수 꿰매 주시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남녀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때였다. ‘아버지가 가사일을 한다’는 문항이 시험에 나오면 정답은 ‘아니다/NO’였던 시절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조금 달랐다. 이런 가정 분위기 덕분에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억누르기보다 풀어주는 태도가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배웠고, 남녀 구분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탓에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는 조금씩 용기를 내어 내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직장뿐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나답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큰 변화였다.
은퇴 후에는 관계의 풍경이 또 한 번 달라졌다. 직장 시절처럼 억지로 이어가야 하는 인연이 사라지고, 누구와 함께 할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편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더 자연스럽게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함께 있으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관계가 은퇴 후 내 곁에 남게 된 것이다.
사는 곳이 멀어지면 관계도 자연스레 정리된다. 동경에 살던 시절이 그랬다. 한국에서 알던 사람들과는 처음에는 연락을 주고받다가도 점차 뜸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한국을 방문할 때 꼭 보고 싶은 몇몇에게만 연락을 하게 되었다. 대신 동경에서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소중한 얼굴로 자리 잡았다.
거제로 내려와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동경에서 자주 만나던 동료와 친구들이 많았지만, 거리가 멀어지니 자연스레 만남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동경을 방문할 때면 몇몇 가까운 친구들만 찾게 되고, 또 그들이 가끔 거제를 방문해 주면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한다. 멀리 있는 인연은 그렇게 소수로 압축된다.
반면 거제에서는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장을 보러 갔다가 인사하며 친해진 이웃, 함께 걷는 길에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게 된 동네 사람들. 먼 곳에 사는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도 여전히 소중하지만, 일상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웃들이 더 가까운 존재가 된다. 결국 거리가 멀어지면 억지로 관계를 붙잡지 않아도, 꼭 이어가야 할 인연만 남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게는 거리가 만들어주는 그런 자연스러운 관계의 흐름이 오히려 편하고 고맙게 다가온다.
나는 관계의 기본에 주고받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일본에서 꽤 오래 산 경험이 이런 생각을 더 확고하게 만든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받은 만큼, 혹은 받은 것보다 조금 더 주는 방식은 가족이나 친구 관계를 지나치게 계산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냐”라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주고받음은 단순한 물질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정성, 그리고 마음이다. 물론 이 마음이 돈이나 선물로 표현될 때도 있지만, 핵심은 서로가 마음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있다.
관계가 지속되려면 이 주고받음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늘 주기만 하고 상대는 받기만 하거나, 반대로 상대가 계속 베풀기만 해서 내가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진다면 관계는 오래가기 어렵다. 이런 경우 나는 굳이 관계를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를 걱정해 주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자연스레 마음이 움직인다. 그들과는 산책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시장을 본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가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소한 시간이지만, 내게는 인생의 소중한 한 조각이다. 그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고 쌓인다.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뒤에서 흉을 보는 사람, 혹은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이제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마음을 괴롭히거나, 흉을 보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감정과 시간을 그렇게 쓰는 건 결국 내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게 힘을 주고 웃음을 주는 사람에게 시간을 쓰고 싶다. 그들에게는 기꺼이 정성을 나눈다. 때로는 직접 만든 음식을 건네거나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일도 즐겁다.
젊었을 때는 의무감에서, 혹은 두려움 때문에 원하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그런 관계를 정리할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관계를 내 기준에 맞게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자유롭고 편안하다.
나는 집에 사진을 걸어둘 때도 이 주고받음의 원칙을 따른다. 나를 웃게 하고, 내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의 사진을 인화해 액자에 넣어 둔다. 바라볼 때마다 고마움이 되살아나고, 내 공간의 일부를 그들과 나누는 셈이 된다. 관계는 결국 서로의 시간을 내어주고, 또한 공간을 나누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예전에는 깊이 있는 인연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해야 관계가 깊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짧게 알았더라도 내게 힘을 주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며, 내가 시간을 쓰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깊은 인연이다. 오래된 인연이든 새로운 인연이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이다.
실제로 동경에서 만난 몇몇 친구들이 그렇다. 학창 시절부터 알던 지인들은 아니었지만, 내 생활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그 태도에서 깊은 신뢰를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거제에서 새로 알게 된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만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나를 살뜰히 챙겨 주고 시간을 내어 주니 어느새 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반대로 오래 알고 지낸 이들 중에는 이제는 자연스레 멀어진 관계도 있다. 예전 같으면 억지로라도 이어가려 했겠지만, 지금은 나를 지치게 하는 관계라면 굳이 붙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쉽게 상한다고들 한다. 그래서일까, 무리해서 억지로 이어가는 관계가 더 힘겹게 느껴진다. 오래 알았으니까, 가족이니까, 친척이니까, 웃어른이니까 하는 이유로 내 시간과 공간을 마냥 내어주다 보면 결국 내가 지쳐 버린다. 그런 경우에는 거리를 두는 게 낫을 때도 많다.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고, 마음을 쓰는 비중을 줄이는 것이다. 그게 차갑게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은퇴 후의 관계는 폭이 아니라 깊이에 달려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굳이 폭이나 깊이를 따지는 일 자체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들, 내게 기쁨을 주고 내 시간을 함께 쓰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그 인연이 길지 않아 깊이가 부족하더라도 충분히 소중하다.
물론 몇몇 오래된 친구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이어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그런 인연이 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새로운 만남 속에서도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나를 지탱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결국 관계의 가치는 오래 알고 지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은퇴 후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하다. 누구에게 내 시간과 공간을 내어줄 것인지, 그 선택이 내 삶의 질을 결정한다. 나는 지금 그 단순한 원칙을 따르며, 억지로 관계를 넓히거나 깊이 재려 하지 않고, 내 삶에 맞는 균형을 찾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