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과 관련된 이야기
은퇴를 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솔직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예전보다 적어 불안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매달 필요한 돈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거제로 이사 오면서 다른 곳의 부동산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도 많았다.
은퇴 후에도 나가는 돈은 예상보다 많았다. 관리비, 각종 세금과 공과금, 보험료, 자동차 렌탈비, 어른 용돈까지 빠짐없이 나갔다. 그 외에도 시장을 보고 외식을 하다 보면 식비가 은근히 많이 들었고, 병원비나 약값처럼 불시에 필요한 지출도 있었다.
처음 몇 달은 각종 고지서와 신용카드 지불 내역을 보면서 ‘과연 이 생활이 지속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마 은퇴를 곧 하게 되실 분이나 은퇴 초기의 분들은 이런 시기를 경험하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나가야 할 돈은 어차피 나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신 지출 구조를 명확히 정리하면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우선, 매달 들어오는 생활비로 처리할 항목을 확실히 구분했다. 관리비와 공과금, 어른 용돈, 보험료, 차 렌탈비, 그리고 먹는 데 드는 비용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식비는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신선한 재료를 사서 건강하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가끔 외식이나 카페에 가는 작은 호사, 생필품 구입이나 속옷이나 수건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비용 등도 이 범주에 넣었다.
반대로, 여행비나 큰 물건을 살 때는 저축에서 꺼내 쓰거나 의외의 수입에서 쓰도록 했다. 계절이 바뀔 때 사는 옷이나 집안의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바꾸는 비용, 집 대청소 비용, 가족들의 경조사 비용도 여기에서 충당했다. 이렇게 생활비와 저축을 구분하니, 매달 돈의 흐름이 한결 단순해졌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은퇴하기 몇 년 전에 딸애 둘이 모두 자립하고 결혼까지 했다는 점이다. 만약 여전히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면 훨씬 더 부담이 컸을 것이다. 아이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우리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돈 가치는 점점 내려가고 연금은 줄어들면 어쩌나, 계속되는 지출에 저축이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면 어쩌나, 투자하다 망하면 어쩌나, 집이 잘 안 팔리면 어쩌나 등등 문득문득 치솟는 불안감이 있다. 그러나 뭐 어쩌겠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다짐한다.
형편과 개인의 철학에 따라 돈을 다루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절약과 호사 사이의 균형을 중시한다. 전기는 불필요하게 켜 두지 않고, 물건을 살 때는 꼭 필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패션에 관심은 많지만, 요즈음은 디자이너 브랜드는 거의 사지 않고 그리 큰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절약만으로는 삶이 지나치게 메말라지고, 평생 열심히 일해 온 나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몇 가지 호사를 누리며 스스로를 대접하려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행이다. 조금 호사스럽게 떠나는 여행은 비용이 적지 않게 들지만, 그 경험이 남기는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다. 낯선 풍경 앞에서 나눈 대화와 새로운 경험, 추억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또 다른 예는 삶과 생활환경을 한층 더 쾌적하게 가꾸는 일이다. 환경과 우리의 호흡 기능을 생각해 자동차를 전기차로 바꾸었는데, 소유 대신 렌털을 선택함으로써 보험료, 세금, 수리, 중고차 판매와 같은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매달 렌탈비를 내지만 그 덕분에 비용보다 큰 만족을 얻고 있다. 또한 쉴 때 편안히 몸을 기댈 수 있도록 삐걱거리던 소파를 새것으로 바꾸거나, 물걸레 기능이 있는 로봇청소기처럼 노년의 생활을 훨씬 편리하게 해 주는 전자제품을 들였을 때, 집안의 공기가 달라지는 만족도 크다.
이처럼 나는 일상에서는 절약을 지키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지출에는 마음을 열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은퇴 이후 내가 선택한, 지출에 있어서의 균형의 방식인데 오래 지속될는지는 두고 봐야 될 듯하다.
우리 부부가 오래전부터 아이들과 나누어 온 철학이 있다. 빌 퍼킨스의 Die With Zero에서 배운 생각인데, 단순히 ‘죽을 때 돈을 하나도 남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이렇다.
돈은 쌓아 두기보다 경험에 쓰일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인생의 시기마다 누릴 수 있는 경험이 다르므로, 그 시기에 맞게 써야 한다.
자녀에게는 돈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철학 덕분에 우리는 저축을 쓰면서도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가끔 불안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경험을 미루지 않고 누리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는 “아이들에게 유산을 남겨야지” 하며 강남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팔지 않고, 스스로 house poor라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 기다릴수록 집값이 올라 아이들에게 줄 유산이 늘어난다는 생각인 듯하다. 정작 본인은 여행 한 번 마음 편히 못 가고, 낡은 집 유지비에 허덕인다. 퍼킨스는 이런 삶에 의문을 던지며, 아이들에게 남겨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함께 한 경험과 삶의 태도라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지만 비용이 부담돼 미루는 여행을 우리가 초대하기도 한다. 현재 하와이나 크루즈 같은 큰 여행은 조금 어렵지만, 가까운 일본 여행이나 국내 여행은 우리가 대부분 지원한다. 여행에서 함께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단순한 돈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애들이 다들 자립하였지만 다음에 자녀가 생겨 교외의 큰 집으로 이사가게 되면 안락한 소파와 멋진 식탁을 선물로 사 주는 것과 우리를 방문하러 오면 같이 인피니티 풀에서 멋진 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곳에 초대하는 것이 내 리스트에 있다.
큰 유산을 물려주는 대신, 아이들이 젊을 때, 필요할 때 나와 함께 누릴 수 있는 경험을 선물하는 것. 그것이 결국 Die with Zero의 철학이자, 내가 은퇴 후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삶의 기반이다.
거제로 이사 온 것도 우리 삶에 큰 전환점이었다.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 계속 살았다면 집값에 대부분의 자산이 묶여, 저축에서 여행비나 생활 개선비를 자유롭게 꺼내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집을 지키는 데 들어가는 세금과 관리비, 수리 비용이 늘 마음을 짓눌렀을지도 모른다.
거제는 분명 물가가 만만치 않다. 시장에서 장을 볼 때나 외식을 하면서 서울보다 더 비싸게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집값 부담이 적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훨씬 숨통이 트인다. 덕분에 생활비와 저축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도, 조금 호사로운 여행을 가거나 집안 환경을 조금씩 개선하는 여유, 조금은 기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무료의 호사를 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닷바람이 들어오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매일의 일상이 작은 여행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의 표정도 대체로 여유롭고, 산책길에서 혹은 시장에서 마주치는 분들과의 짧은 대화에서도 따뜻함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곳에서 돈을 균형 있게 쓰면서 삶이 한층 풍족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 있으니, 굳이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마음이 채워지는 점이 있다. 대도시에서라면 아마 이런 경험을 누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제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거제 이야기 (https://brunch.co.kr/brunchbook/geojestory)'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은퇴 초기에는 돈에 대한 불안이 컸다. 하지만 생활비와 저축을 나누어 관리하고, 절약과 작은 호사를 오가며 균형을 찾아가면서 마음이 점차 편안해졌다. 지금 돌아보면 은퇴 후의 돈 이야기는 ‘얼마나 벌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쓰고, 어떻게 누리며 살아가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경험에 돈을 쓰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려는 태도가 삶의 중심에 있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도 다르고, 삶의 철학도 다르다. 그래서 은퇴 후 돈을 다루는 방식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나는 그저 내 형편과 성향에 맞는 길을 찾아 조금씩 조정해 가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은퇴의 균형이고, 또 나에게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