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몸이 알아차린다. 그동안 종종 틀어두던 에어컨의 리모컨과 선풍기도 치워 놓았다. 아침저녁으로 문득 긴팔 옷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계절은 이미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괜히 옷장을 열어본다. 여름 내내 손 닿지 않던 자리에 걸려 있는 재킷 하나, 얇은 머플러 하나를 꺼내 들며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계절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 은퇴생활 단상은 이번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매일매일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으나, 다른 주제에 대한 생각이 맴돌고 있어서 추후 생각이 정리되면 다른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달라지면, 생각나는 음식도 달라진다. 과거의 여러 일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도, 이상하게도 어릴 적에 먹던 음식들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생생하다.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와 생선 구이, 손수 빚은 커다란 만두, 소풍 때 싸주시던 김밥 등은 추억의 음식으로 종종 기억난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어김없이 엄마의 꽃게탕이 떠오른다. 나도 엄마고 할머니인데, 왜 아직도 엄마의 단출한 꽃게탕이 생각나는 것인지.... 된장을 약간 푼 국물에 다른 채소나 양념은 거의 넣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그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가을에 살이 통통히 오른 꽃게 덕분이었을 것이다. 온 가족이 상에 둘러앉아 먼저 꽃게를 실컷 먹고, 그다음에야 밥을 먹었다. 단순하지만 시끌벅적했던 그 식탁이 가끔은 그립다.
가을바람이 불면 또 하나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바로 소고기뭇국이다. 소고기 국물에 부드럽게 익은 무,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나는 냄새. 그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는 평소 건강에 좋다고 해서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먹었지만, 소고기뭇국이 있는 날엔 꼭 흰밥을 지었다. 그 밥에 연탄불에 구운 윤기 흐르는 김을 곁들이면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한 끼였다. 이제 내가 똑같이 소고기뭇국을 끓여보지만, 그때의 맛이 나지 않는다. 인덕션 위에서 프라이팬으로 구운 김도 연탄불에 구운 그 김의 맛을 따라갈 수 없다.
엄마는 건강에 유난히 관심이 많으셨다. 요즘은 건강 때문에 보리밥을 먹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쌀이 부족해서 정부 시책으로 보리밥을 권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시책 이전부터 가족의 건강을 위해 보리밥이나 콩밥을 자주 지으셨다. 1990년대 초, 녹즙기가 처음 나왔을 때 우리 집도 커다란 녹즙기를 마련하였다. 거실 한쪽 냉장고는 늘 각종 채소로 가득 차 있었고, 엄마는 콜라겐이 많다는 음식을 챙기셨다. 닭발을 삶아 국물을 먹고, 그 뒤에는 콜라겐 흡수를 돕는다며 과일을 먹이셨다. 아마 일본에서 정기 구독하시던 장쾌(壯快)라는 건강잡지에서 본 레시피였을 것이다. 우리가 커서 외국으로 출장을 간다고 하면 엄마는 이렇게 물어보곤 하셨다. ‘그 나라 건강식품 중에 이거, 저거 있으면 좀 사 올 수 있을까? 바쁘겠지?’ 그렇게 은근슬쩍 부탁하시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거제로 이사 와서 처음 알았다. 전어가 가을의 최고 생선이라는 사실을.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의 명성을 듣고 한껏 기대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엄마가 연탄불에 구워 주시던 싼 꽁치 구이 맛에 못 미친다. ㅎㅎ 그래도 저녁 바람에 실려 오는 전어 냄새를 맡으면, 아,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맘때가 되면 이상하게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내 경우, 굳이 ‘가을 영화’라기보다, 공기가 선선해지고 마음을 추스르고 싶을 때 어울리는 영화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은 이미 여러 번 본 작품들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October Sky (1999)다. 아마 제목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을이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탄광촌의 한 소년이 우주로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 영화 속에서 광부인 아버지는 현실을 원했지만, 아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꾼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의 꿈을 믿고 격려해 주던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아, 꿈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부모의 역할 못지않게 선생님의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새삼 느꼈다.
또 하나 떠오르는 영화는 Dead Poets Society (1989)이다. 가을 캠퍼스의 낙엽, 교복 차림의 학생들, 그리고 영어 교사 존 키팅(John Keating)이 전하던 말 —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 는 여전히 마음을 울린다. 정해진 틀에 갇힌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계절과 상관없이 감동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선선한 바람이 불 때는 내 마음이 더 움직인다.
역시 오래된 또 하나의 영화, When Harry Met Sally 도 생각난다. 아마도 영화 곳곳에 나오는 뉴욕의 단풍 장면들이 정말 아름다워서 일 것이다. 그 따뜻하고 낭만적인 이미지가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이 오랜 영화들을 한동안 다시 보지 않았는데, 이번 가을이 가기 전에 그중 한 편을 다시 보고 싶다.
지금은 단풍이 막 시작되기 전, 나뭇잎들이 서서히 색을 바꿀 준비를 하는 시기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이미 울긋불긋한 단풍의 풍경이 그려진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가을은 대학원 시절, 인디애나 대학 (IU) 블루밍턴 캠퍼스의 가을이었다.
캠퍼스 곳곳에 투명하게 붉어지는 나뭇잎들과 노란 은행잎들, 그 사이로 여전히 초록빛을 간직한 나무들, 잔디 위에 흩날리기 시작한 낙엽들. 공기 속에는 흙냄새가 섞여 있었고, 학생회관 카페에서는 커피 향이 퍼져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가을 풍경이었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유학생이던 내가 도서관이나 강의실로 바삐 걸어가던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캠퍼스의 가을은 내게 특별했다. 그 안에는 위로가 있었고, 왠지 모르게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르치던 대학 캠퍼스의 가을 또한 잊히지 않는다. 캠퍼스 안에 집이 있었던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집 주변에서 강의실로 향하는 길마다 단풍나무와 은행잎이 물들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봄철 벚꽃이 필 때를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가을이 더 기다려지는 계절이었다. 가을과 함께 살고, 가을 속에서 일했던 그 시절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그 계절이 늘 내 곁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거제로 이사 오면서 가장 아쉽게 느낀 것도 바로 그 ‘가을의 풍경’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계룡산 중턱, 편백과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건강한 산 중턱에 있다. 주변에는 골프장의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구름이 둥실 떠가는 푸른 하늘도 아름답지만, 일본에서처럼 집을 나서 몇 걸음만 걸으면 물든 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던 풍경이 여기에는 없다. 물론 케이블카를 타면 노자산의 단풍을 볼 수 있고, 동부저수지 근처의 은행나무길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도 어쩐지 조금은 부족하다.
그렇다고 단풍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경주의 불국사나 지리산, 내장산처럼 단풍으로 이름난 명소들이 가까이에 있어, 시간을 내기만 하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집 근처의 가을’을 느끼고 싶다는 작은 그리움이 남는다. 너무 욕심이 지나친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든다.
거제에 온 이후, 나의 가을은 굳이 단풍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특별한 일정이 없어도 그저 바람만으로 설레는 계절, 구름과 어우러진 하늘이 멋진 계절이 되었다. 나이 든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큰 새로움이나 자극이 없어도, 그저 일상 속에서 기쁨과 평온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이 가을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쉽다. 이번 가을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거제의 숨은 명소들을 찾아보려 한다. 우선, 동부면의 혜양사와 신광사를 들러볼 생각이다. 내가 사는 거제면과 이웃한 동부면에는 여러 사찰이 있는데, 그중 혜양사는 절 주변의 정원과 나무 숲이 아름답고 산책하기에 좋다고 한다. 또 다른 절인 신광사는 봄에는 벚꽃이 아름답지만, 가을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숲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라 하니 꼭 가보려 한다. 하청면의 맹종죽 테마파크도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름이 다소 낯설어 그동안 그냥 지나쳤지만, 대나무 숲 속을 걸으며 가을바람을 느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