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푸른 달빛처럼 시가 느껴지는 한 강 작가의 소설책 <내 여자의 열매>
한 강 작가의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 문학과지성사, 2024(초판 2018)>를 선택할 때 이미 나는 시를 읽겠다는 마음이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기 전부터 나는 그의 책이 긴 시 같다고 생각했었다.
한 강 작가는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 4편과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다수 문학상을 수상해왔고 소설집 3권, 8편의 장편 소설과 1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나는 그의 문학세계를 헤집어 볼 생각자체는 이미 없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그의 책을 일부러 산 적도 없다. 이미 갖고 있거나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으면서 지내고 있을 뿐이다.
봄이 지날수록 알맹이가 빠져나간 듯 허전해진 마음 주머니에 그의 책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담겨있었던 것처럼 몰래 스며든 것같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아마도 단편소설이라 내가 먼저 사귀자고 덤벼든 것이 맞을 것이다. 연한 핑크빛 속살의 이 책은 연휴가 지난 주말 내내 내 가방과 책상과 카페 어디든 내 반경 1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
예전에 쓴 소설이면 어떤가. 밀폐된 방의 눅눅한 창문을 열고 공기가 바뀌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든 한 강 작가의 문장이 가늘고 섬세하며 한지의 종잇장처럼 얇게 펄럭이는 문장으로 내게 펄럭이며 안겨오는 것이 중요할 뿐.
비평가들은 싱싱한 횟감 같은 퍼덕이는 문장들의 배를 갈라 익숙하게 내장을 제거하고 뼈를 발라 꼬들꼬들한 식감의 평론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농축된 문장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어떤 의미를 담으며 봄을 지냈다. 소설과 소설을 떠돌며 문장을 주워 담기에도 바빴고 행간이 깊어 미처 뛰어넘지 못해 밤이 깊도록 소설 근처에 앉아있었다.
아내는 반소매 아래 드러난 앙상한 두 팔을 쳐들더니 티셔츠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었다. 나는 짧은 신음을 뱉고 말았다. 지난봄만 해도 갓난아기 손바닥만 했던 피멍들이 이제 큼직한 토란 잎으로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멍의 색깔도 그때보다 진해졌다. 봄날의 연푸른 실버들 가지가 여름 들면서 짙게 푸르러진 것 같은 둔탁한 녹색이었다. 마치 타인의 몸을 만지듯이 떨리는 손을 뻗어 아내의 멍든 어깨를 쓸어보았다. 얼마나 아프게 다치면 이런 멍이 드는 것일까. <내 여자의 열매, 14쪽>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턱없는 비유겠지만, 공들여 옻칠을 하고 유약을 바른 다과상 같은 음성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아껴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꺼내게 되는, 가장 좋은 차와 다기를 올려놓고 싶어지는 단아한 찻상 말이다. <내 여자의 열매, 21~22쪽>
아이는 개들의 등 뒤로 얼핏 봤던 흙펄을 떠올렸다. 물기를 머금어 마치 곱게 빻은 유릿가루 같던 그 흙벌에 비칠 황금빛 구름의 무늬를 상상하자, 아이의 가슴은 좀 전까지의 놀람이 아닌 이상한 설렘으로 뛰기 시작했다. 저 하늘 안에 무엇이 있어서 저런 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저렇게 잠깐 동안만 빛을 내보내곤 사라져 버리는 걸까. 바다까지 걸어가면 그걸 알 수 있을까, 하고 아이는 생각했다. 저 빛이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볼 수 있을까. <해 질 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47쪽>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산간 출신인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 널따란 강이었다. 내륙에 역류해 들어온 바다와도 같이 깊고 검푸른 강줄기를 보며, 마치 새로운 세계의 기쁨이 막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쥐어진 듯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감흥은 잊힌 것이 되었다. 그는 움푹 꺼진 눈으로 강 수면에서 튕겨져 나오는 무수한 빛줄기를 바라다볼 뿐이다. <어느 날 그는, 192쪽>
사랑이 뭔데? 그가 할 말을 잃고 있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랑이라는 게 만약 존재하는 거라면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영원을 믿어? 있지도 않은 영원이라는 걸 당신 힘으로 버텨내려고? 버텨내 볼 생각이야? <어느 날 그는, 208쪽>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이 또 다른 사람은 누구인지 그는 모른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한 채 그는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렇게 묵묵히 바라보는 그 사람을 다시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본다. 그, 다시 바라보는 그 사람을 더 물러서서 바라본다. <어느 날 그는, 236쪽>
다만 끈질기게 햇빛을 욕망해 왔습니다. 어두운 층층계를 오르내릴 때, 가등 없는 골목의 끝에서 대문 열쇠를 꽂을 때, 뒤축이 닳은 구두를 끌고 지하도를 나설 때에, 상상 속의 햇빛이란 얼마나 눈이 부시던지요. 출퇴근길이나 외근 중에 보던 서울의 햇빛과는 비할 수 없는 밝기로 상상 속의 햇빛은 찬란히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흰 꽃, 315쪽>
이렇게 적요한 밤이었지. 한약 달이는 냄새같이 씁쓸하고 거무죽죽한 어둠이 인적 없는 골목에 자욱이 가라앉아 있었지. 고르지 않게 시멘트가 발라진 길바닥을 통해 크고 작은 발소리들이 아득하게 울려오곤 했지. 내 더러운 손가락들은 발갛게 곱아 있었지. 두 귓바퀴는 얼음칼로 도려내어지는 것 같았지. 맞은편에 늘어선 이층짜리 서민 연립 주택은 들창마다 달맞이꽃 저럼 노란 백열등을 밝히고 있었고, 빼곡히 어깨를 맞댄 슬래브 지붕들 위로 푸르게 지질린 달이 보였지. <철길을 흐르는 강, 341쪽>
1996년에서 2000년 사이에 쓰인 이 소설들은 조금 더 깨끗하고 넓은 수조로 옮겨져 싱싱하게 헤엄치는 것 같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 사이를 걷다가 마침내 책장을 덮는 내게도 급한 허기가 느껴졌다.
아름답고, 어렵고, 가까이 가고 싶지만 먼 곳에 있는 이야기들이 보슬거리는 봄비처럼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책의 길이 끝나는 골목에서 우산도 없이 서있다가 허기와 추위와 빗물에 젖어 마침내 나는 나만이 쓸 이야기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