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스토리텔러가 그림에 담긴 느낌을 천천히 이야기하자 문득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며 다가오는 것 같은 놀라운 책
예술 인문학 감성이 가득한 책 <그림이 말을 걸 때, 이수정, 리스킴, 2025>를 읽었다. 이 책의 지은이 이수정 작가님은 예술 전문 강연자이자 아트 스토리텔러다. 천천히 깊게 대화하듯 그림을 바라보는 법을 전한다. 그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지향한다. 강의하고 여행하고 글 쓰며 지내는 분이다. 미술이 미술관의 그림과 조각품 이상의 철학을 갖는다면 작품 안에 깃들인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표지에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오필리아, 1851~1852>가 누워있다. 실은 막 죽은 오필리아인데 마치 살아있듯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공허하며 희고 아름답다. 햄릿의 연인이던 오필리아는 발을 헛디뎌 강에 빠져 익사했다. 연못에 떠 있는 오필리아 근처에 무심하게 던져진 꽃들은 그녀와 함께 소멸하기에는 여전히 싱싱하다.
책의 표지에 홀려 책을 읽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극사실주의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책을 받아 들고도 나는 막 죽은 것 같은 오필리아를,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생각했다.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란 이런 때일까. 이수정 작가님은 이 책에서 어떤 그림을 말해줄까. 이 책에는 4개의 꼭지에 32개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었다.
책을 읽기에 앞서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쓰려고 했는지 궁금해서 나는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를 먼저 읽기도 한다. 세상에나. 나처럼 세상의 무용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가치에 특별함을 느끼는 분이라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인간이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지도 않고, 뚜렷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미술이 어째서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 왔을까? 이것은 미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음악, 문학, 연극과 같은 예술들 역시 우리의 생존과는 무관해 보이는 예술들도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해 왔다. 어쩌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쪽
고흐가 그린 밤하늘의 별은 고흐의 삶을 모르면 그 별빛이 눈물 빛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밤하늘의 별이 고흐의 눈물 때문에 더욱 아른거리며 빛났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27쪽 하단부에 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작가의 현실이 그림 속에 녹아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림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작가를 알아야만 할까? 이런 생각이 들자, 책을 읽는 마음이 좀 무거워졌다.
마음이 무거우면 책 읽기가 즐겁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생각의 앞뒤를 뒤집어 보기로 했다. 아무 정보도 없는 예술 작품이라도 오히려 그 그림을 통해 작가의 마음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까?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작가의 감정을 느껴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책에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상처 입은 남자, 1844~1854>가 등장했다. 이 작품은 귀스타프 쿠르베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 것처럼 작가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부터 말하고 있다. 그의 표정을 보고 느껴지는 호기심에 대한 묘사도 있었다. 나는 작가가 말하려는 그림 속의 남자를 묘사하는 문장이 참 좋았다.
남자의 오른 어깨 위로 보이는 칼자루, 순백의 셔츠를 피로 물들인 붉은 피, 코트 자락을 움켜쥔 왼손 등에 불쑥 솟아오른 정맥, 그리고 저 멀리 어둠을 가르며 밀려오는 새벽의 미명.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한 남자의 운명적 종말을 속삭이는 듯했다. 46쪽
프란시스코 고야의 검은 그림의 이야기는 책의 시작과 끝에 있다. 고야가 삶에 대해 질문하듯 그린 그림은 광기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고야는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년 작품들에는 끝내 치유되지 못한 상처와 깊은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331쪽
매력적인 화가들과 뮤즈들의 이야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천천히 깊게 이 책을 읽었어야 함에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알고 있어서 반가웠고, 모르는 이야기는 신비롭게 느껴져서 몰입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샤갈이 등장했고, 라파엘로가 왜 미혼으로 살다가 죽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두 번째 작품 피에타가 미완으로 말없이 등장했다. 두 장면이 한 페이지에 있는 것만으로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대해 더욱 처절한 아픔이 느껴지는 것에 대해 누구라도 공감했을 것이다.
작가가 특별히 내게 말하는 것 같은 문장도 있었다.
진정한 감수성은 경험의 유무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세계로 다가가려는 이해와 상상력의 확장 속에서 피어난다. 그것은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그저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보는 일종의 정신적 여행이다. 312쪽
좀 더 나은 시간을 살아보고자 할 때, 사람들의 말이 소음처럼 느껴져 세상이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그림이 있을 것이며 아트 스토리텔러 이수정 님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감성 가득한 그림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