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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시인 유희경 님의 필사 에세이 '천천히 와'

by 김영신

<천천히 와, 유희경, 위즈덤하우스>가 집에 도착했다. 책은 단단한 커버를 뚫고 마음을 연결하듯 창이 나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창밖에는 무아지경으로 책을 읽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이 책의 작가님인지 아니면 저 창 안에서 바라보는 나인지 언뜻 헷갈렸다. 제목에는 두 개의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천천히 와.

지은이 유희경 작가님은 문예창작과 극작을 공부한 사람이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다. 현대문학상과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탔다. 지은이는 이 책 작가의 말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기다린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끌리기를 사로잡히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는 기다림을 쓴다. 기다리는 대상을 쓰고 기다림을 쓰고 기다림의 앞과 뒤를 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작가가 이끌렸던 이야기들이고 천천히 오라는 의미는 기다리는 작가의 이야기로 오라는 의미였다. 하나의 이야기가 독자를 만나 우리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유희경 작가님의 문장에 마음이 휙 쏠렸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가 쓴 친필 글씨가 수록되어 있고 바로 이어서 작가가 건넨 문장을 독자가 쓸 수 있는 필사 공간이 있다. 작가 어머니의 필사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이 가득해졌다.

깊은 밤, 밤의 요정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함께 책을 읽는다. 책 속의 어떤 이야기들이 잠들지 못하도록 저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지 궁금하다. 25개의 주제로 나눈 글은 수려한 산문이며 작가의 깊은 내면과 관련되어 있다. 읽다가 울컥하는 순간에는 이 책에 가끔 나오는 이런 그림을 보며 쉬어갔다.

책을 읽다 보면 유희경 작가님이 시인이고 산문을 쓰지만 현재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가 고스란히 나와 있기도 하다. 시를 써서 밥을 먹는 일은 고단하고 밥을 먹기 위해 하는 일이 노동이라면 시가 노동일 수 없기에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생활의 고단함을 쓰면서 작가가 기다리는 손님에 관한 이야기가 맑다.

때는 겨울이다. 시집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작가가 창문을 열고 콧속 얼얼한 찬 공기를 맡고 있을 때 손님이 계산하려고 시집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 푸르게 그려졌다.

첫 필사 문장 "나는 기다린다. 약속이 되어 있다는 듯. 그런 기분이 들면 꼼짝할 수 없다. 시계탑 아래서 초조한 사람처럼.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어긋난 버릴까 걱정하며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처럼. 마음의 각도가 아슬해지고 애틋해지면,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가보는 것이 상책이다."를 읽으며 같은 공간 다른 생각의 사람이면 어떤가 하는 생각도 했다. 시집을 사는 사람이라면.

내가 자주 되뇌곤 하는 단어는 후숙. 천천히 익어가다. 후숙의 마침은 알맞게 익음이며 나는 내 삶 어딘가에 그러한 지점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성숙하지 못하여 자주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풋내 나는 떫은맛을 느끼곤 하지만 이 또한 후숙으로 가는 과정이리라. 나는 반점 하나 없는 바나나를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어째서 바나나로부터 아무런 욕망이 일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98쪽

편지 쓰기는 정말 어렵지요. 편지는 독백이고 그러므로 대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편지의 편은 소식 편이기도 하지만 한쪽 조각 편을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답 없는 독백의 사방은 어둡습니다. 무대 위 배우의 독백을 상상해 보지요. 그는 홀로 조명을 받은 채, 자신의 심경을 진심의 형식으로 고백합니다. 그와 같은 글이 편지에는 적힙니다. 편지글은, 그러므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 주저합니다. 길을 잃은 말. 그것이 편지. 214~215쪽

나는 편지를 쓸 때, 연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우면 그만인 글은 편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메일을 편지로 치지 않는 이유도 같습니다. 편지는 되도록 오래 남아 있어야 해요. 편지에게 걸맞은 최후는 오직 불태워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215~216쪽

그리고 오은 시인의 문장도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등장했다. "기다림은 마음을 쓰는 일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닳지 않는다. 더 반질반질해진다. 더 바빠지기만 한다. 더 불어나기 일쑤다.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은 부자다. 기다림 속에서 사는 사람의 속이 깊어지는 이유다." 이 책을 천천히 읽었으면 하는 지인의 바람도 들어있었다.

지은이의 묵혀둔 이야기들이 책으로 묶여 도착했을 때 마침 나는 나만의 이런저런 얘기를 좀 묵혀둘까 하던 참이었다. 쌓아둔 얘기들이 시간 안에서 좀 숙성되기를 기다려보려던 참에 '기다리는 사람'이 만년필로 꾹꾹 눌러서 쓴 책 편지처럼 도착한 것이다.

위로란 상실 앞에서 흐느끼는 사람에게 필요하다기보다 그 마음을 어쨌거나 추슬려 겨우 일어난 사람의 어깨를 감싸는 목도리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목도리 같다고 생각했다. 춥고 황량한 겨울 아침 같은 인생을 지나고 있거나, 울다가 이제 좀 그쳐볼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천천히 읽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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