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거는 안 돼

연애에서 동거까지

by 황종하

한국에 가서 그녀의 가족들을 만났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언니들과 오빠 그리고 형부들과 새언니. 그녀는 5 남매의 막내였다. 그들은 내가 결혼하기 위해 인사 온 줄 알았다. 그녀가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불찰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제안한 건 동거였다. 그녀도 승낙했고 미국 가기 전 식사나 같이 하자는 오빠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였고 난 미국에서 날아서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갔다. 부담스러운 자리였지만 그녀 입장을 생각하면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건 그녀에게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전혀 반대가 되었다. 오빠를 제외한 다른 언니들은 동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나왔다. 그리고 펄쩍 뛰었다. "동거는 안 돼, "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가족들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고 받아쳤다. 그럼 왜 바쁜 사람 불렀냐고 넷째 언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난감한 분위기 속에 그래도 나의 기분을 달래주려는 다른 가족들의 예의가 고마웠다. 일찍 일어나자는 그녀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난 끝까지 앉아서 그 불편한 자리를 마감했다. 미국에선 동거가 너무 흔한 일이라서 나도 너무 가볍게 생각한듯하다. 미국에선 동거하면서 가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특히 내 나이에는 더욱.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도 동거를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다 그런 건 아닌 듯하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고 난 본가 부모님 댁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그냥 Happening으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그동안 위태위태했던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겐 매력적인 면이 많고 대화가 잘 통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항상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그녀의 생각과 태도가 있다. 약간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있다. 누구나 이기적인 면은 있고 혼자 사업을 하다 보니 속물적인 부분도 생겼으리라 이해하며 지내왔다. 주저하면서도 그동안의 좋은 시간들을 가졌기 때문에 동거를 하며 더 알아가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한 이후 나의 주저함은 불안감으로 증폭되었다. 한국에서 여자를 꼬셔서 미국으로 데리고 온다는 생각자체에 회의가 들었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 모든 걸 중단하고 싶었고 당분간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본가로 돌아와서 나의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나눈 후 누나들이 대구방문은 어떠했냐고 궁금해했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신다. 난 사실대로 말하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몇몇 에피소드를 통해 말했다. 이때 난 좀 비겁한 행동을 했다. 가족들에게 내가 만나는 여자를 이야기하면서 그녀를 보호하거나 칭찬하는 대신 부정적인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가족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유도했다. 누나들도 펄쩍 뛰었다. "그런 여자는 안 돼, " "보통 여자가 아니다, " "좀 더 시간을 두고 신중히 생각해라" 등등. 그래서 도망가고 싶은 나의 비겁함에 정당한 이유를 덧붙이고 싶었다. 적어도 난 객관적으로 내가 만나는 여자를 묘사했어야 했고 가족들의 부정적 판단이 날아올 때도 적어도 같이 정죄하지는 않았어야 했다. 평소에 좋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한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평소에 아무리 공자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도 순간적으로 무의식에 자신의 행동과 말을 내어주면 언제라도 졸부가 될 수 있다.

나는 가족들의 평가를 귀담아들어야 했지만 그들의 생각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생각과 판단을 좀 더 강하게 붙들어야만 했었다. 난 이미 미국에 산지 28년이 되었고 그들은 그저 먼 고향에 있는 나의 가족들일뿐이다. 미국에서의 나의 일상에 아무 상관이 없고 특히 내가 같이 살 여자에 대해 그들은 아무런 영향력을 미쳐서는 안 된다. 나도 그들의 입김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날 나의 귀는 얇았고 나는 나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의 동의를 유도했다.

그럼 난 왜 그토록 도망가고 싶었을까? 그녀랑 같이 사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 부담되어서? 아니면 갑자기 그녀가 싫어져서? 모든 사건들은 부수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이유는 내 안에 있다. 난 그녀를 선택하고 좋은 만남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녀도 많이 노력했다. 덕분에 우린 꿈같은 연애의 시간을 가졌고 Honeymoon 같은 시간을 여러 번 가졌다. 그동안 같이 찍은 사진들을 바라보면 나도 왠지 눈물이 난다. 이렇게 기쁜 시간을 같이 했던 사람과 지금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나. 헤어지자는 얘기를 못하고 대신 시간을 좀 가지자고 변명하는 나. 나는 무엇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게 되었는가?

사실 이 주저함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여러 가지 단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포용하려고 하다 보니 지금까지 온 것이다. 연애도중 헤어질 뻔한 몇 번의 에피소드에서 난 관계를 끝내는 대신 일단 계속하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 발생한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난 그런 모습을 받아들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잘난 체하고 교만한 여자이다. 처음부터 그녀의 말투와 생각에서 이런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많이 알게 된 후부터는 이런 부정적인 면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날 당황하게 하는 말을 무심코 던진다.

- 이젠 부모님과 내가 동급인가요? (자신이 내 부모님 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다.)
- 숙식제공은 하겠으나 나머지 비용은 내가 내라 이런 말인가요? (미국에서의 생활비에 관한 대화이다)
- 종하 씨는 내가 돈보고 올 정도의 수준은 아니에요 (내가 가진 돈의 수준이 대단하지 않다는 뜻 같다.)
- 날 먹여 살린다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에요 (미국 오면 내가 은퇴의 삶을 살게 해 준다고 했다)
-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에스코트를 하지 않은 상황)
- 지금까지 돈 쓰면서 그렇게 chip 하게 계산했나요? 결혼했으면 큰일 날 뻔 한 사람이었네. (이건 농담이었다고 했다)

적어도 이런 구체적인 내용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런 말투와 내용을 언급하면 그녀는 그건 농담이었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아무 뜻 없이 혼자 말로 한 것이라고 한다. 영어에 Slip of the tongue이라는 표현이 있다. 무심코 흘러 나오 말이 진심이라는 뜻이다. 위의 말은 이번에 한국에 머물면서 같이 지냈던 이틀 동안에 들은 말들이다. 짧은 시간 많은 말을 했고 많은 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우린 서로의 바닥을 드러냈다. 마치 헤어질걸 각오를 하고 솔직히 할 말들을 다 꺼내 놓았다. 다행히 우린 최소한의 예의를 서로에게 갖추었고 민감한 내용을 대화로써 소통할 수 있었다. 모든 걸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걸 대화로 털어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이런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처음부터 내가 느껴왔던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그녀는 가끔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난다고 했다. 5남매의 막내이고 결혼 안 한 막내딸이라서 그런지 그녀에게 엄마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에게 엄마가 특별한 이유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신 존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착한 본성을 아시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형제자매도 곱게 보지 않는 그녀의 막내다운 이기심과 교만 뒤에 있는 착하고 순수한 딸의 모습을 어머니는 아셨던 것이다. 나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끔 발견하곤 한다. 그녀의 표현 데로 겉으론 날라리 인척 하지만 실재로는 범생이였다는 것이다. 그녀를 깊이 알아갈수록 나도 이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누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숨겨진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연다. 나도 그녀에게 내 마음의 문을 오래전 열어두었다.

어느새 나도 매우 까다로운 남자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축구 좋아하는 여자면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말이 잘 통하고 취미가 비슷하면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추가해서 속궁합이 잘 맞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이런 조건이 만족되는 사람을 만나고 나니 나는 구차하게 다른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있다. 나의 기준은 왜 이렇게 까다로워졌을까? 현실적인 문제는 다 닥치면 같이 해결하며 살려고 했는데 같이 살 때가 가까워 오자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나는 부담을 느끼고 있다. 갑자기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나는 왜 이런 변화를 하게 되었을까? 위에 언급한 그녀의 부정적인 모습 이외에 무엇이 또 있었을까?

연애는 쉬운데 결혼은 어렵다는 말을 요즘 실감한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결혼을 너무 서두른듯하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드디어 내가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을 맘 놓고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갑자기 누구랑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막연한 부담이 몰려왔다. 일단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지고, 경제적 부담도 늘어날 것이 걱정됐다. 같이 살 여자를 미국에 데리고 오면 비자신청, 자동차 구매, 자동차 보험, 의료보험 등등 기본적인 의식주 이외에도 현실적으로 추가비용이 늘어난다. 혼자 조용히 은퇴를 즐기려 했던 계획이 힘들어질 수 있다. 그래도 감당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니 갑자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어려움들을 감당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있는 듯하다. 관계가 좋으면 현실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살아온 나인데 지금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그만큼 그녀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에 경제적 부담을 다 감당할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사랑하면 모든 걸 다 감당해야만 하나?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는 독립된 개인으로 만남을 가질 수는 없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