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사랑이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상당히 통찰력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이상주의적 사랑을 갈망해 오고 사랑의 정신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해 온 기독교적 가르침의 반발심에서 나온 강한 관심이었다.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인터넷에 이와 관련된 글들이 많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책에서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론을 다 뒤져봐도 종족번식을 위한 사랑이라는 내용은 있었도 정확히 성욕이 사랑이라는 말은 찾을 수 없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에 같은 내용이 나오지만 작가는 정확히 그 출처가 어딘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말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 두껍고 어려운 책을 다 읽을 수 없었다. 평소에 좋아하는 책을 영어로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영어로 읽으면 그 의미가 좀 더 뚜렷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그의 책은 영문버전으로는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그의 에세이를 모아둔 글이거나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가 전부이다. 인생론이란 영문책은 없다. 아마도 한국에서 그의 에세이를 모아서 이런 제목을 부친 듯싶다.
내가 유난히 원문을 찾아서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이유는 그의 통찰에 감탄은 하지만 충분히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린 유명한 철학자가 한 말에 다 동의할 필요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다. 그의 철학을 좋아하지만 그도 역시 당시 시대적 사상과 관습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성을 정말 무시하는 사람이다. 사도바울도 여성은 교회에서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사랑이 종족번식 욕구에 의한 행동이라는 걸 21세기 저출산시대에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한 번 더 집중해 보는 이유는 그 말이 전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는 관점(Perspective)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성에 대한 인류의 생각은 오랫동안 종교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거의 2000년 동안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 까지 그 영향력을 끼쳤다. 남녀의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인간이 임의로 깨뜨릴 수 없다는 도그마는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한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이 교리를 인정할 수 없어서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오기까지 했다. 이혼하기 위해 국교를 바꾸는 첫 사례가 된 것이다. 물론 그의 동기 부여는 사랑이 아니라 왕권을 이어가기 위한 정치적 판단에 불과했지만 결혼이란 관습 속엔 종교적 영향력이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문화적 분위기에 반기를 들기 위해 쇼펜하우어가 19세기에 사랑의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기독교는 사랑의 정신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했다. 수녀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는 생각이 수많은 여성이 평생 섹스를 안 하고 혼자 사는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은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여성에겐 비극과도 같은 가르침이다. 이런 기독교적 금욕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성욕이 사랑이라고 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런 게 아니고 정말로 종족번식의 욕망이 사랑이라고 의미했다면 이건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인간의 사랑이 단지 유전자의 번영을 목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처럼 그의 다소 공격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건 내가 직접 섹스를 하면서 이 사랑의 감정과 정신적 사랑의 연관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섹스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호르몬의 작용과 도파민의 상승을 고려하면 일시적으로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섹스의 절정에 다다르거나 그 이후 느끼는 엄청난 친밀감속에서는 인간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냉랭하던 부부관계가 다시 뜨거워지고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던 연애하는 사이는 갑자기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단순히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섹스가 끝난 이후에 인간의 정신적 사랑으로 연결이 된다. 내가 사랑을 느꼈던 여인에게 평생 헌신하고 싶고 성실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여성이 더 강하게 느끼지 않을까 추측한다.
좀 더 섹스의 육체적인 요소가 정신적인 요소로 변화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인간의 실존(Predicament)은 혼자라는 사실이다. 다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반쪽을 찾고 싶어 한다. 혼자 사는데 익숙해지고 혼자 있는 걸 너무 즐기는 중년의 성숙한 여성조차 이젠 누군가를 만나서 남은 인생을 같이 나누고 싶은 욕망이 있다. 지성이 주는 만족감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실존적 외로움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인간의 근본적 외로움(Isolation)이 해소되는 경험이 섹스이다. 여기서 섹스라 함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한 여성과 또는 남성과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하나의 결합(Union)을 경험하는 순간 인간은 잠시나마 자신이 혼자임을 잊게 된다. 문제는 이런 사랑의 감정이 장기간 지속되지 못해서 인간은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육체적 사랑의 감정이 성숙한 관계를 통해 장기간 지속될 때 인간은 가장 이상적이 행복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
육체적 사랑의 관계에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정신적 사랑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섹스할 땐 그럴 것 같았는데 반복된 섹스에 지루해질 수 있고 새로운 파트너를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섹스를 통해서 발생하는 일시적이지만 정신적 사랑의 동기 부여가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단지 경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연관성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어쩌면 이런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성욕이 사랑이다라고 했는 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연관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평생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정신적인 사랑만을 강조하거나 육체적 사랑은 저속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이 힘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현대사회에서 뛰어난 외모는 모든 사랑의 시작이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의미는 그녀의 Sexual Attraction을 좋아한다는 의미다. 나의 몸이 느끼는 행복감과 그로 인한 정신적 사랑의 발생은 동시에 발생한다. 물론 인간의 고귀한 사랑은 성욕이상의 그 무엇이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만을 놓고 볼 때 성욕이 없는 사랑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평생 연애를 하는데 섹스를 하지 않는 관계가 가능할까? 누군가에겐 가능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보편적이지 않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연인은 사랑하면 상대의 몸을 원한다. 그리고 이때 느끼는 행복감은 삶의 모든 목적이 될 정도로 강렬하다. 이걸 아는 사람은 섹스 없이 살지 못한다. 설령 어쩔 수 없이 섹스를 하지 않고 산다 하더라도 이건 최선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노자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성인위복이 불위목(聖人爲腹(而)不爲目)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복(腹)이란 인간의 배를 의미한다. 먹는 음식이 들어가는 배. 그래서 내 몸이 살아 움직이는 걸 의미한다. 목(目)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기에 좋은 것들을 의미한다. Plato가 이상국가를 얘기할 때 중국에서는 배를 위하는 게 성인이란 말을 했다. 결혼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하루 세끼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연애할 때 느꼈던 낭만적 사랑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대신 밤마다 나를 만져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의 육체적인 접촉이 중요해진다. 어떤 면에서 결혼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정신적인 측면 보단 육체적인 측면이 크다. 노자는 큰 나라보다는 작은 나라를 선호했다(小國寡民).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 거창한 이상국가보다 중요한 것은 내 한 몸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작은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많은 걸 공부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 몸이 건강할 때 배가 부르고 잠자리 때 옆에 안을 수 있는 여인이 있다면 그걸로 행복하지 않을까? 섹스가 사랑이다라는 그의 말은 노자생각을 서양적으로 표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