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셋 너머 이야기
전화벨이 울리면
전화벨이 울리면 상담실의 공기는 달라진다.
기계음 하나뿐이지만, 그 소리는 단순한 알림이 아니다.
곧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불만, 누군가의 분노가 내 귀를 통해 흘러 들어올 것이라는 신호다.
헤드셋을 고쳐 쓰고 모니터 화면에 고객 정보가 뜨기도 전에 손가락은 이미 버튼 위에 놓인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짧게 내뱉은 인사말은 훈련된 톤으로 덧칠해진 미소처럼, 준비된 감정의 가면이자 내 하루의 첫 장이다.
얼굴 없는 대화의 무게
첫 통화가 시작되면, 얼굴 없는 대화의 무게가 그대로 다가온다.
상대의 분노, 불만, 짜증, 혹은 숨겨진 불안이 목소리를 통해 스며든다.
고객의 한숨 하나에도 심장이 조여오고, 사소한 침묵에도 긴장이 흐른다.
보이지 않는 얼굴은 때로 보호막이 되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긴다.
오늘 하루도, 나는 이 목소리들의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출근길 기억이 겹쳐오다
출근길 보도를 걸으면서 떠올랐던 기억들이 다시 스친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으로 친구들 사이의 다툼을 중재할 때, 마음은 여리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띠고 상황을 수습하던 나.
그때 느낀 감정이 지금 상담실에서의 긴장과 겹친다.
나는 늘 타인의 하루를 지켜주는 역할을 맡지만, 정작 내 마음은 뒷전이었다.
그 무게감이, 얼굴 없는 상담에서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목소리 하나하나에 민감해지다
첫 전화가 걸려오면, 고객의 목소리 톤과 숨소리, 잠깐의 침묵, 걸음걸이조차 느껴지는 듯한 그 모든 소리에 민감해진다.
상대가 짜증을 부리는 순간, 단 한 마디라도 잘못 말하면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도 사람이다.
감정을 숨긴 채 하루 종일 기계처럼 반복해야 한다는 압박이 내 안에 스며든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단정히 고쳐서 다시 인사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나의 하루는 이미 상담실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얼굴 속 집중력
보이지 않는 고객의 얼굴 때문에 상담은 한층 더 어려워진다.
화난 상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목소리만으로 모든 신호를 읽어야 한다.
한숨 하나에도 상황을 판단하고, 억양의 미묘한 변화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피로와 긴장을 누르고, 다시 친절을 입혀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반복 속 새로움
이 직업은 반복적이지만, 매 순간 새롭다.
같은 문의, 같은 불만이라도 사람마다 목소리와 감정의 결이 다르다.
어떤 고객은 단순히 지쳐있어 한숨을 내쉬는 것일 뿐이고, 어떤 고객은 화를 억누르며 분노를 숨긴다.
상담자는 그 모든 차이를 읽고 대응해야 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얼굴 뒤에, 누가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추측하며 하루를 견뎌야 한다.
상담 준비 과정의 긴장
상담 준비 과정에서도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컴퓨터 화면에는 처리해야 할 문의가 줄줄이 올라와 있고, 한편에는 동료들이 바쁘게 타이핑 소리를 내며 전화를 받고 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다음 통화에서 작은 실수 하나가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압박이 스며든다.
그럼에도 오늘도 헤드셋을 쓰고 버튼을 누른다.
목소리를 통해 하루를, 누군가의 감정을 책임지는 일을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친절
그렇다고 모든 것이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끔, 고객이 짧게 던지는 친절이나 감사의 말이 하루의 긴장을 깨고 스며든다.
“덕분에 해결했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은 문장 하나가 귀를 타고 마음 속 깊이 스며들어, 이 무게를 견디게 만드는 힘이 된다.
하루의 끝에서 다짐하다
하루의 시작, 이 시간의 긴장과 설렘,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상담자는 오늘도 목소리를 올리고 내린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받아내는 자기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 매일 반복된다.
상편의 끝에서, 상담자는 숨을 고르며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하루를 위해 목소리를 지켜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