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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사라진 풍경 part2.

필름사진, 기다림이 남긴 한 장의 기적

by 김지윤


스마트폰을 꺼내면 단 몇 초 만에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는 ‘한 장‘을 찍기 위해 오래 고민하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 사진은 지금과 달리 너무 소중했고, 무엇보다 기다림이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익숙했지만, 사라진 풍경 속중 ‘필름사진‘에 대해 담아보고자 합니다.


기다림이 남긴 한 장의 기적


유리창에 비친 노을을 담고 싶어 셔터를 누른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셔터음과 함께 내 안에 남겨진 것은 ‘과연 잘 나왔을까 ‘하는 설렘이 담겨있었다. 스마트폰처럼 즉시 확인할 수 없었기에, 그 질문은 며칠간 내 마음속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주는 설렘은, 어쩌면 사진 그 자체보다도 더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주는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기다림 이주는 특별한 감정, 한정된 기회가 만들어내는 진중함, 그리고 실패조차도 소중히 간직하던 마음가짐을 말입니다.


필름을 넣는 의식


검은색 카메라 뒷면을 열고, 조심스럽게 필름을 걸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작은 톱니에 정확히 맞추어 필름을 끼우고, 뒷면을 닫을 때 들리던 ‘딸깍‘소리. 그 소리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오늘을 기억하겠다는 일종의 선언 같았습니다. 엄지손가락으로 필름 감는 레버를 당길 때, 내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저항감은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경건함을 선사했고, 새 필름을 카메라에 장착하는 일은 그저 기계적인 행동이 아닌, 앞으로 펼쳐질 소중한 시간들에 대한 약속과도 같았으니까요.


셔터를 누를 때마다 화면 한쪽에 줄어들던 숫자. ‘36‘에서 시작해 ’ 35,34…‘ 차례로 줄어드는 그 숫자가 줄어들수록, 마음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더해졌습니다. 마지막 장이 다가오면 괜히 아껴야 할 것 같아 쉽게 찍지 못하던 그 아쉬움. 숫자가 ’ 10‘을 내려갈 때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찾아왔습니다. 아직 찍지 못한 순간들을 위해 몇 장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이라는 숫자가 떴을 때, 마치 소중한 보물의 마지막 조각을 쓰는 듯한 특별함이 있었고, 이 한 장을 어떤 순간에 쓸 것인가? 그 고민 자체가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감정의 풍경입니다.


“괜히 지금 찍었다가 아까워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우리는 장난스럽게 셔터를 누르는 대신, 찍을 만한 순간을 한참 기다렸다가 한 장을 남겼습니다. 지금처럼 무심히 카메라 버튼을 누르던 시대와는 다른, 묵직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친구와 함께 교복을 입고 벤치에 앉아 사진을 찍으려 할 때였습니다. 서로 자세를 잡고, 표정을 고치고, 한참을 준비한 끝에 비로소 셔터를 눌렀죠. 그렇게 남긴 한 장의 사진에는,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우리가 공유한 시간과 웃음, 그리고 그날의 공기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기다림 속의 설렘


사진관에 맡긴 뒤, 며칠을 기다려야만 결과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길게는 일주일, 짧아도 사흘 이상은 걸렸습니다. 하교 길에 들른 작은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던 날, 주인아저씨는 항상 “금요일에 와야 받을 수 있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월요일이면 그 말은 곡 일주일에 가까운 기다림을 의미했죠.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아쉬움과, 금요일이 다가올수록 커져가는 기대감은 지금의 ‘새로고침‘버튼이 줄 수 없는 감정의 스펙트럼이었습니다. 그 며칠 동안의 기다림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을 키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나는 어떤 표정일까? 친구와 찍은 사진은 잘 나왔을까?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채로 하루하루를 기다리던 그 마음. 수업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주말 바다에서 찍은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지 상상하곤 했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을 담은 그 한 컷이 제대로 나왔을까?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그려보는 동안, 교실은 잠시 바다가 되었고 분필 냄새는 바다 내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다림은 그렇게 일상 속 작은 여행이 되었습니다.


사진관 앞에서 종이봉투를 받아 들던 순간, 손끝이 떨리던 기억도 있습니다. 투명 테이프를 잘라내고, 사진을 꺼내며 한 장 한 장 확인하던 그 떨림. “이거 잘 나왔네.”, “아, 눈 감아버렸잖아.” 웃음과 아쉬움이 함께 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둘러앉아 사진을 나누어 보던 순간들도 생생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다며 웃었고, 또 누군가는 뜻하지 않게 잘 나온 사진에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필름에 담긴 추억을 함께 나누는 시간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SNS에 바로 올려 ‘좋아요 ‘를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직접적이고 따뜻한 교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촬영 직후 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때는 기다림 끝에 만난 사진이어서 더 특별했습니다. 흔들렸거나 초점이 빗나간 사진조차도, 기다림의 무게 덕분에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받아 든 사진 중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의외로 너무 뻔하게 잘 나온 사진이었습니다. 완벽한 구도와 밝기로 찍힌 그런 사진들보다, 오히려 의도치 않게 프레임 한쪽에 걸린 나뭇잎의 그림자나, 갑자기 고개를 돌려 흐릿해진 웃음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으니까요. 우연과 실패가 만들어낸 그 특별함은, 어쩌면 필름사진만이 선사할 수 있는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실패조차 남겨진 기록


필름사진에는 실패가 많았습니다. 빛이 과하게 들어와 하얗게 날아가 버린 장면, 손이 흔들려 번져버린 인물, 카메라 렌즈에 스친 뜻밖의 빛줄기. 생일 파티에서 친구들과 찍은 단체사진, 모두가 웃고 있지만 내 눈만 감겨있는 그 한 장.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지금 그 사진을 보면 오히려 그날의 들뜬 마음이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완벽한 순간보다, 완벽하지 않은 진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실패조차 시간이 지나면 웃음이 되었고, 오히려 의도하지 않는 흔들림이나 빛의 얼룩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 따뜻한 장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필름사진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실패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은 오히려 귀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인생도 필름사진과 닮아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필름사진은 그런 삶의 진실을 조용히 보여주는 매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장의 무게


지금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십 장의 사진이 찍힙니다. 잘 나온 사진만 골라두고 나머지는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스마트폰 갤러리를 열어보면 1년 동안 찍은 사진이 수천 장에 달합니다. 그 많은 사진들 사이에서, 정작 기억에 남는 순간을 찾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립니다. 역설적이게도 사진이 많아질수록, 각각의 사진이 가진 의미는 희석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무한대의 가능성은 때로 유한한 소중함을 앗아가기도 하는 것일까요?


그러다 보니 사진은 많아졌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사진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습니다. 디지털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같은 장면을 조금씩 다르게 찍은 수십 장의 사진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을 담아내려는 욕심이 오히려 그 순간 자체를 희미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한 장에 모든 것을 담으려 애쓰던 필름사진 시대의 집중력은, 어쩌면 순간을 더 깊이 경험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필름사진 시절에는 '한 장'이 주는 무게가 분명했습니다. 정말 이 순간을 남길 가치가 있을까? 다시 찍을 수 없는 순간일까?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시간


지금도 서랍 어딘가에는 오래된 필름사진이 남아 있을 겁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랬고, 뒷면에 누군가의 이름이나 날짜가 적혀 있는 사진들.


엄마의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20대 시절의 사진, 붉은색 스웨터를 입고 활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은 내가 알던 '엄마'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이 엄마라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아온 한 개인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필름사진은 그렇게 시간의 층위를 넘나드는 다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 잊고 있던 목소리와 냄새, 웃음소리까지 함께 되살아납니다.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을 붙잡아 두는 작은 마법이었으니까요.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찍은 가족사진, 그 속에는 지금은 흰머리가 된 아버지의 검은 머리와,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 할아버지의 미소가 담겨 있습니다. 사진 속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우리가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의 브랜드는 지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장의 사진은 그렇게 수많은 시간의 층위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가끔은 그 오래된 사진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디지털 사진들은 과연 20년 후, 30년 후에도 지금의 필름사진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을까요? 하드디스크의 고장이나 클라우드 서비스의 종료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이 약속한 '영원함'보다 아날로그의 '유한함'이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혹시 당신에게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필름사진이 있나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기다림이 있었기에 더욱 소중했던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나란히 선 졸업사진, 첫 월급으로 산 옷을 입고 찍은 자랑스러운 표정의 자화상, 혹은 여행지에서 낯선 이에게 부탁해 찍은 흔들린 기념사진. 그 모든 사진들은 지금은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선명한 닻이 되어, 우리를 그때의 감정으로 다시 데려다주곤 합니다.


필름사진은 단순히 사라진 기술이 아니라,


기다림과 설렘, 실패와 웃음을 품은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필름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아니라, 그때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한정된 기회 속에서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완벽하지 않은 결과도 포용하며, 기다림의 가치를 알았던 그 시절의 우리 자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우리는 가끔은 그런 마음가짐을 되찾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오래된 사진 봉투를 열어보세요.


그 안에서 발견한 얼굴이, 지금의 당신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치 필름이 단 한 장만 남은 것처럼, 이 순간이 정말 기록할 가치가 있는 순간인지. 그렇게 찍은 사진 한 장은, 수백 장의 무심한 사진보다 더 오래 당신의 기억 속에 남을지도 모르니까요.


디지털 시대에도, 우리는 아날로그적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도 유한한 소중함을 놓치지 않는 지혜, 그것이 필름사진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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