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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할 수 없는 변덕스러움

Jailbreak

by Jimmy Park

“The only thing constant about human nature is its inconsistency.” (Oscar Wilde)


습관적으로 커피를 내려야 나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상무님, 커피 좋아하셔서 한꺼번에 주문했어요."

"앗, 뭐 이런 것까지 챙겨주고... 고마워요."


글로비스에 다닐 때 글로벌 사업개발실에서 사무실로 스타벅스 커피 캡슐을 들고 왔다.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그때 알았다.

그전엔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일하기 전에
컵을 닦고, 새 물을 채우고, 캡슐을 넣고 커피를 기다리고 하는 여유가 좋았다.
그런데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가 싶었다.

그 이후엔 원두 종류도 바꿔보고 다양한 향도 음미하고 했던 것 같다.

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얼마 전 커피팩토리를 운영하는 동생에게 과테말라 원두를 선물 받았다.

커피에 진심인 친구라서
본인이 직접 선별한 신선한 원두를 선물로 보내온 것이다.

나는 집안을 뒤져서 그라인더를 찾아냈다.

나무로 된 조그만 그라인더였는데 아내가 바리스타 교육받을 때 샀던 거였다.

원두를 한 움큼 쥐어 그라인더에 넣고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큰 머그잔 위에 깔때기 잔을 올린 후 종이 필터를 펴고 커피를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알라딘에서 나올 법한 끝이 길고 뾰족한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가장자리부터 돌려가며 조심스럽게 부어주었다.
거품이 뽀골뽀골 올라왔다. 커피 향이 온 집에 퍼졌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정성 쏟아 뭔 가를 해본 게 오랜만인 것 같았다.

창 밖 풍경과 어우러져 마음속 작은 풍요가 느껴졌다.

그래 이거지...

그 동생에게 너무 고마웠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아내에게도 커피를 타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 분의 커피를 그라인더로 가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수동 그라인더가 너무 작아서인지 손도 너무 아프고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커피잔을 들고 마주 앉아 마시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한 잔씩 커피를 내리느라 나만 분주할 뿐이었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원두 가는 것만 자동으로 해줘도 훨씬 편할 텐데...
폭풍검색에 들어갔다.
역시, 쿠팡엔 없는 게 없었다.
리뷰를 꼼꼼히 읽은 끝에 충전식 자동 그라인더를 하나 구매했다.
그다음 날 받자마자 원두를 넣고 자동으로 갈기 시작했다.
너무 편했다.
그렇게 아내와 근사한 커피 모닝이 시작되었다. 완벽했다.

한 일주일을 그렇게 해보니 이젠 물 내리는 게 불편했다.
처음엔 주전자로 천천히 돌려가며 한 잔씩 정성 들여 내리는 게 좋았는데
커피가 똑똑 떨어지고 있는 걸 보고있자니 속이 탔다.
물을 천천히 붓고,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조금 더 붓고,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1분이 한 시간 같았다.
이 물만 누가 내려주면 그동안 내가 다른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내에게 말했다.
"나 왜 미국 사람들이 집에 자동 드립커피머신을 사는지 알 것 같아."
그다음 날 아침에 보니 머신이 주방에 올려져 있었다.
가만히 보니 예전에 쓰던 거였다. 이거 아직 버리지 않았었구나.

자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자동 드립커피머신에 넣어 커피를 내렸다.

커피가 완성되면 머그잔 두 개를 꺼내 따르면 끝이었다.

이제야 아내와 마주 보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세상 편했다.


한참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젠 다 내린 커피 원두를 버리는 게 귀찮아졌다.

내릴 때의 커피 향은 최고지만 다 내린 후의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이제 여름이라 쓰레기 통에 버리는 것도 찜찜했다.

말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번 비닐에 넣어 버리기도 힘들고...

이 커피 좀 쉽게 버릴 수 없을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캡슐은 버리기 쉬웠는데...
그러고 보니 캡슐과 물만 넣고 버튼을 누르면 되니 이게 훨씬 더 간편하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난 네스프레소 머신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동생이 보내 준 과테말라 원두도 다 끝냈으니

이젠 다시 캡슐커피의 차례인가...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

익숙해지면 편해지기도 하지만, 신비감이 사라지면 불편해지기도 한다.

지금 누리는 것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가도
조금 더 편한 걸 한번 경험하게 되면 지금 걸 못 견뎌하기도 한다.


사람의 니즈란 것은 한꺼번에 오는 게 아니다.

바로 직전 행동의 불편함을 해소하게 되면

차선의 니즈가 더 크게 느껴지면서 순차적으로 오는 것이다.

그걸 따라가며 만족시켜 주면 그 모든 게 사업이 된다.

원두가 사업이 되고,

수동 그라인더와 주전자, 종이 필터가 사업이 되며,

자동 그라인더가 사업이 되었다가,

자동 드립커피머신이, 그리고 네스프레소 머신과 캡슐이 사업이 된다.

이 모든 게 귀찮으면 그냥 카누 한 봉을 털어 넣어도 된다.

그러면 또 카누 인스턴트커피가 사업이 된다.

기호품인 커피 하나도 그런데 필수품들은 어떨까?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가 사업이 된다.

지갑을 여는 것은 사람의 본능에서 시작한다.

혼자 너무 앞서 가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뒤처지지도 말고,

사람의 변덕스러운 본능을 딱 반 발짝씩만 차례로 앞서가면 된다.

(Grinding Coffee,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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