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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킴 Aug 11. 2024

출퇴근

일기

당일 아침에는 막힘 없이 나가야 하니까 

전날이나 전전 날에 미리 표를 사 놓는다.

그렇다고 해서 꼭 그 시간대의 기차를 타는 것은 아니다.

출근길에는 기차가 자주 있어서 웬만해선 10분 이상 기차를 기다리진 않는다.

그러나 GWR을 타선 안된다. 

더 비싸고 빠르고 검표도 자주 하고 벌금이 크다.


언젠가 어느 퇴근길에는 엘리자베스라인이 취소, 지연을 반복한 날이 있었다. 

다시 재개되었다고 해서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 역에서 문 관련 이슈가 생겨 지연이 됐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다는 두어 번의 방송 후 결국 다음 기차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배짱 있는 방송에 몇 푼 더 주더라도 그냥 제시간에 정상적으로 가는 다른 기차를 그 자리에서 편도 예매하고 타러 갔다. 새 기차의 플랫폼을 찾았지역무원이 앞에서 열어주지 않고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잘못 걸린 것 같은 촉.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돈 버리겠구나 싶은 촉. 서둘러 방금 산 표를 취소했다. 그러나 언제 올지 모르는 완행 엘리자베스로 돌아가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른 기차를 예매하고 별다른 게이트 없이 기차에 탔고 자리에도 앉았다. 자. 그럼 환불을 시작해 볼까. 오늘 아침에 받은 기차 취소로 인해 환불이 가능하다는 링크를 따라가보니 해당페이지는 없어졌단다. 기차가 재개되어서 그런가 보다. 그럼 지연환불은? 지연환불도 안된단다. 30분 이상 지연이 돼야 그나마 부분환불이 되는데 내가 여기저기 옮기는 동안 비슷하게 출발했나 보다. 표 한 장 버렸고, 아까 잘못산 편도도 다시 보니 수수료가 2.75파운드나 붙는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검표인이 우리 코치로 와서 표검사를 시작한다. 아 그래도 벌금은 안 물겠구나 하고 당당히 표를 보여줬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다들 불만이다. '내가 예매한 기차가 취소돼서 다음 편 타라고 안내받았는데 다음 편은 이 기차였어요' 모르는 척 잡아떼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기차를 옮겨 타면 새 표를 사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무렵. 검표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몇몇 승객이 그냥 주의만 듣고 벌금을 물지는 않았다. 심지어 내 옆의 아저씨는 자고 있었는데 그냥 지나갔다. 괜히 억울한 기분. 

그러나 이직을 하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이런 시행착오를 몇 번 겪고 돈도 날리고 시간도 꽤나 날려야 내 최적의 출퇴근 루트를 찾을 거라는 것을.


또 다른 어느 퇴근길에는 5시 45분 5시 50분 패딩턴에서 출발하는 엘리자베스라인은 숨쉬기 어려운 지경으로 막힌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오늘만 이러는 거겠지 했지만.. 아 도저히 힘들 지경으로 사람이 많고 그 시간대를 놓치면 20분을 더 기다려야 하고.. 머리를 굴리며 앞뒤로 꽉 막힌 기차 안에서 '다시는 이 공간에 이렇게 타지 않으리라'를 되뇌며 맵을 열었다. 눈을 씻고 보고 검색도 해보고 다시 보고 봐도 이 루트 밖에 없는 건가 하던 순간 눈에 보이는 초록라인. 일링 브로드웨이에서도 갈아탈 수 있구나!

심지어 4파운드나 더 싸다니. 반가운 마음에 3일 후 기차를 예매해버렸다. 프로모션 코드와 함께.

그리고 3일 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출근길.

똑같이 가다가 한 정거장만 일찍 내려서 갈아타면 된다.

기차에서 내렸다. 패딩턴에서는 10분 이상 걸어야 갈아탈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어느 정도 걸을 걸 예상하고 서둘러 두리번거렸는데. 세상에나 바로 옆에 있다.

아니 근데 라인을 갈아타는데 카드는 어디서 찍지? 바보같이 역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거라고? 아닐 텐데..

곧 출발하는 전철이라 에라 모르겠다. 그냥 탔다. 회사 역에 도착해서 카드를 찍으니 그냥 통과가 된다. 흠.

탈 때 찍지 않아서 꽤나 청구되겠구먼. 그래도 환승시간을 많이 줄였고 기차 가격도 4파운드나 줄여서 다행이다.

진작에 좀 잘 알아볼걸. 

퇴근길에 같은 역에서 환승을 하는데 아침부터 나의 고민. 아니 이렇게 환승 게이트가 없으면 그냥 애초부터 기차 예매 안 하고 카드로 찍고 탈 수 있는 건가? 그럼 레일카드 할인이 안 들어가는데? 도대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야 하는 순간 눈앞에 들어온 어느 구석의 카드 머신. 작디작고 하찮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앙증맞게 카드 탭하는 몇몇 사람들. 아.. 그냥 여기서 알아서 찍는 거구나. 모든 퍼즐들이 맞춰졌다. 이제 알았다. 이 정도 허튼짓했고 시간 돈 들였으면 최적의 출퇴근길 루트 찾은 거다. 직감.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TFL Q&A를 한참 돌아보며 환불 규정을 완독 했다. 오늘 아침에 못 찍은 건 받아야 하니까..


5년을 집에서만 일하다가 다시 출퇴근하니 집에서는 집에만 있고 싶다. 없던 체력은 더 고갈나고 하루중에 두어시간 겨우 기분이 좋고 긍정적이다. 그 자리에서 꾸준히 살아온 사람들을 동경했었는데 막상 나도 시작할 조건이 주어지니 동기와 목표가 없어진 것 같다.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하루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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