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힘들고, 우리는 모두 그리운 시절이 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어느 순간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내 배우자가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고 느낀다. 그리움, 불만족, 재미없음에 지쳐 어느 날 아침 인생 동반자에게 모든 것을 탓하고 최대한 멀리 도망친다. 그리고 협박이 묻은 문자를 남긴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그가 가엽다.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나면 내가 너무 가여워져서 어제의 위로는 잊고 비슷한 협박 묻은 문자를 보낸다.
아직도 선명한 영국 입국 날.
반듯하고 잘 다려진 정장과 분홍, 하양의 꽃다발. 늦은 시각이어도 뭘 좋아할지 몰라 그냥 준비해 본 아메리카노를 들고 환한 미소로 히드로 공항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고마움을 한껏 표현했지만 사실 그저 두 개의 이민 가방, 한 개의 기내용 캐리어, 백팩을 나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았을 뿐이다.
4년간 세 번의 이사, 두 번의 이직, 다섯 번의 한국행 그리고 수만 번의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허례허식 가득한 결혼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에 코로나 덕에 별 큰 핑계 없이 식을 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출장이 잦기로 예정 돼있던 그의 직장도 모두 재택으로 전환되었다.
왠지 모르게 더디게 되는 나의 현지 적응, 초반엔 혼자 하는 외출도 그는 가슴을 졸이며 걱정했고 그런 걱정과 관심 덕분에 나답지 않은 조신하고 얌전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4년을 같이 살고,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잤다.
좋을 때는 너무 좋아 어찌할 줄 모르고 나쁠 땐 인생이 끝난 것처럼 땅굴을 파기도 했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 둘 다 지쳐버린 어느 날.
늘 있어왔던 생활 방식에 마찰이 있었고 그는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후 이혼을 통보받았고 또 다른 이주일 후 이혼 방식과 여러 가지 그의 계산에 기반한 요금들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멋있는 이별을 말들을 남겼다.
왜 그렇게 싸웠는지 알 수 없는 감정 소모의 시간들, 내가 그를 다 이해할 순 없겠지만 이렇게 순간 결정을 해 버리는 건 모두에게 손해일 것인데.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자기 발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뭐가 그렇게 급한지 어서 빨리 끝내자고 재촉을 해대서 일단 차단을 해놓고,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바쁜 일상 속에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도저히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순간에 꼭지가 돌아버리는 사람.
그도 그렇겠지만 나도 살며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인가 싶었다. 같이 있으면 딱 좋은 만큼 싫기도 하다.
그와의 인생이 쉽지는 않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끝을 통보받으며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이렇게 떠날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어떻게 던 나를 떠날 사람인 것 같아 조금이라도 젊을 때 나를 위해 그만하는 게 낫지 않을까. 뭐가 됐던 이 유럽땅에선 한쪽이 원하면 이혼이 된다고 하니 내가 뭘 결정할 수는 없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싫은 것을 피하고, 조건을 따져보고, 이런 사사로운 이유들 말고 그냥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실행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헤어지는 마당에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한 자, 한 자 적으며 새로운 삶을 잘 찾아가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