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명, 24평
성당에서의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옥과 베드로는 혼배성사를 올리고 살림을 합쳤다. 새 가정을 꾸린 곳은 진섭과 순옥의 명의로 장만했던 그 운하맨션이었다.
새엄마의 말로는 베드로 아저씨가 오락실도 했었고, 낚시점도 했었고, 슈퍼마켓도 했었다고 하였지만, 현재 어떤 일을 하는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 귀가하는 것으로 보아 직업이 있는 듯했지만 구체적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집에 쌀이 동나거나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일은 없었기에 주연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네 명이던 가족이 세 명이 되고 이젠 하루아침에 다섯으로 늘었다. 머릿수는 증가했지만 24평 평수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방도 여전히 두 개뿐이었다. 딸이 두 명, 아들이 한 명. 그러다 보니 병진은 작은방에서 쫓겨나 거실에서 지내게 되었고, 순옥과 큰방을 같이 쓰던 주연은 최은영과 작은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이마와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팬 은영과 함께 일어나고 자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 편할 리 없지만, 언제라도 보육원으로 쫓겨날 수 있는 처지임을 스스로 잘 알기에 주연은 불만 따위 있어서도 안 되고 행여 있다 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가족 구성원이 늘어난 주연의 중학교 2학년은 집이고 학교고 기댈 곳이 없었다. 모친의 가출을 지켜보고, 부친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큰 시련을 안겨준 한 해였다.
견디다 못한 주연이 순옥에게 어디로든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달라며 양손을 포개고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간절함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볍게 외면당했다.
그 당시 IMF 사태로 인해 극심한 위기를 겪고 있던 국내 경제는 순옥의 화장품 방문판매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판매량이 줄어들자 당연히 가계 수입도 감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밖에 나가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는 베드로 아저씨도 언제부터인가 안방에 틀어박혀 매일 같이 소주를 들이부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주연은 안방을 등진 채 빈 도시락통을 뽀독뽀독 씻었다. 반찬 세 가지와 쌀밥을 싸 갔는데 한 입도 떠먹어보지 못하고 최은영의 패거리에게 빼앗겨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주연은 소매를 끌어당겨 눈물을 훔쳤다.
최은영은 주연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은영은 주연에게 가족도 아닌 년이 이물질처럼 중간에 끼어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병진 오빠와 성씨가 달라서 남들한테 가족이라고 소개하기가 참 애매한데, 이 복잡한 가정사에 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심 씨까지 꼭 보태야 하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 게 너무너무 쪽팔린다며 악을 썼다. 은영이 나열하는 심주연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 중에 주연의 의지가 작용한 바는 단 하나도 없었다.
너저분한 개수대를 정리한 주연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베드로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는 소주병을 꼭 쥔 채 가만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집 안은 눅눅하고 가라앉은 공기로 무거웠다. 주방과 안방 사이 벽에 걸린 시계는 건전지를 교체하지 않아 멈춘 지 오래였다. 움직이지 않는 바늘은 무심하게 흐르던 시간마저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것만 같다.
적막이 감도는 실내에 베드로의 한숨이 섞여 들었다. 찌그러진 종이컵에 소주를 부어 한 번에 들이켰다. 아저씨는 술상으로 쓰던 양은 밥상을 갑자기 주먹으로 쾅,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빈 종이컵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고, 소주병은 술상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결국 옆으로 넘어갔다. 반쯤 남은 소주가 울컥울컥 주둥이에서 흘렀고, 공기 중에 짙게 배어든 술 냄새가 문틀을 넘어 주연의 후각을 찔렀다.
주연의 눈에 베드로와 진섭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겁이 났다. 그래서 주연은 평소보다 더 열심히 주방을 치우고, 베란다에서 다 마른빨래를 걷어와 옷을 개고 시키지도 않은 다리미질까지 바지런히 이었다. 바닥을 쓸고 닦고 쓰레기통도 비웠다. 이 정도면 자기도 새엄마도 책잡힐 일이 없을 거라고 믿으며 작은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안방에서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주연의 발목을 와락 붙잡았다.
“야, 이년아! 니는 내한테 하교오 다녀와아슴니다, 인사도 안 하나?”
쿵, 쿵, 쿵, 하고 바닥이 울리더니, “니도 내 무시하나?” 이내 솥뚜껑 같은 손이 주연의 옆머리를 대차게 후려갈겼다. 목이 90도로 돌아간 주연은 2미터 넘게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주일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해 마지않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손찌검당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뭐, 뭐하는 짓이고! 아아는 와 때리고 지랄이고!”
하지만 들킨 건 처음이었다.
“니 미칫나? 이게 무슨 짓이고?”
마침 현관문을 열고 귀가하던 순옥은 출근용 뾰족구두를 신은 채 그대로 집 안으로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구석에 고꾸라진 주연의 작은 머리를 감싸며 베드로에게 고함쳤다. 공기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고성이 오고 갔다. 머리통이 얼얼하고 귀가 먹먹하다. 주연은 순옥도 맞을까 봐 큰일났다 싶었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순옥도 베드로도 서로에게 물리적인 폭력은 가하지 않았다. 주연은 졸였던 가슴을 남몰래 쓸어내렸다.
아마도 이날이 기점이었던 거 같다. 순옥이 최은영에게 가시가 돋친 잔소리를 일삼고, 베드로가 병진에게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던 게. 서로의 부모에게 쥐어박힌 최은영과 이병진은 주연에게 분풀이했다. 제 가슴에 박힌 가시를 빼 주연에게 배로 갚아주었고,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주연을 짓밟았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생활이 버거웠던 주연은 이젠 집에서 숨만 쉬어도 욕을 먹었다.
*
해묵은 기억이 하나둘 자동 재생되었다. 그땐 어렸고 지금은 다 컸다. 성인이 된 주연은 구슬피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고 선 150세대 운하 맨션을, 우산을 들어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저기 보이는 저 검은 창문 너머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팠고, 서러웠고, 슬펐다. 지금 당장도 얼마나 다양한 아픔과 서러움과 슬픔이 저곳에 도사리고 있을까….
전학은 집안 사정상 불가능하다고 해서 주연은 결국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치르고 자퇴했다. 감사하게도 순옥이 자퇴에는 동의해 주었다.
주연은 우산을 내려 운하맨션을 가렸다. 즐거운 기억 하나 없는 집을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누군가는 반드시 돌아가고 싶은 곳을 집이라고 한 댔지만 주연에게 집은 언젠가는 반드시 탈출해야 하는, 어렸던 아이에게 크나큰 미션을 안겨준 시련 그 자체였다.
발길을 돌려 북쪽으로 잠시 걸었다. 보폭을 크게 벌려 물웅덩이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운동화에 흙탕물이 묻고 말았다. 1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거리. 보행자를 위한 보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오고 가는 자동차를 재주껏 피해야 했다.
걸음이 느려진 곳은 용문달양(龍門達陽)이라고 적힌 해저터널의 입구였다. 미수동과 당동을 이어주는,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바다 아랫길. 정말이지 예전 그대로다. 주연은 우산을 뒤로 젖혀 시야 가득 해저터널을 담았다.
미수동에서 인평동으로 가는 버스 배차 간격은 길었지만, 당동에서 인평동으로 가는 배차 간격은 짧았다. 어렸던 주연에게 해저터널은 등하굣길의 일부였다. 학교를 관두고 방황하던 시절의 주연에게 평범한 나날을 안겨준 준희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준희가 영원히 사라진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