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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 Apr 12. 2024

3.  해주고도 욕먹는 게 이런 거구나.

미국 직무연수 기간은 10년 차 직장인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 맘 때쯤 일하는 것은 너무나 스트레스였다. 승진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탈출하고 싶어 시간을 쪼개어 영어공부를 하고, 바쁜 와중에 연차를 써 면접 준비를 해 미국 직무연수에 합격을 했다. 나 자신으로서는 성취였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직장을 다니면서 미국 해외연수 기회까지.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아니었다. 본인이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질 것을 두려워하고 나 때문에 자기 커리어를 ‘희생’ 한다고 나에게 생색을 냈다. 나는 애 둘 낳느라 3년을 이어서 육아휴직을 썼는데, 자기는 이제 처음 쓰려고 하면서 말이다. 아, 내가 육야휴직 3년을 하며 감당해야했던 커리어 로스(career loss)에 대하여 언급할라치면 남편은 본인이 군대 다녀온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편은 직장에 들어온 후 장교로 3년 반을 복무했다. 결혼한 후였다.) 정말 말문이 막히는 대답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J2비자 발급을 위해 일하기 싫어하는 프로그램 코디와 10개가 넘은 장문의 영어메일을 주고받으며 씨름하고, 집을 구하려 인터넷을 뒤지고 줌 투어를 할 무렵, 남편은 매일 페어웰(Farewell) 저녁약속을 잡고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겼다. 저녁에 아이들과 통화라고 할라치면 반드시 시부모님을 통해야 했다. 우리 집 정리도 시부모님, 정확히는 시어머니 몫이었다.  


한 번은 저녁에 전화가 와서는 여권과 서류가 든 박스가 안 보인다고 했다. 내가 안방에 있는 주황색 상자에 중요한 서류들을 넣어 보관하고 이것들은 꼭 챙겨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걸 한방에 다른 짐들과 함께 몰아넣어버린 거다. 그러니까, 안방 정리도 어머님이 다 하신 거다. 그러나 그 서류는 이미 비자 신청을 위해 제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동일한 여권이 아니면 다시 모든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자연히 입국도 지연될 터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몇 번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알려준 사항이었다. 남편은 짜증을 내며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이 때는 짜증은 냈지만 나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기가 힘듦을 호소할 뿐. 자기가 잘못한 것이 명백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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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일단 출근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었다.     


다만 돌이켜보면 시가 식구들이 다녀간 후에는 한동안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 남편이 나에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국에 있던 1년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시부모님 두 분이 오셔서 한 달 , 시누가 아들(22개월이었나....)과 어머님을 데리고 3주를 다녀갔다. 우리 집을 베이스캠프로 두고 다 함께 일이주씩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시부모님이 와 계시는 한 달 중 일주일은 내가 타 지역 워크숍으로 집을 떠나 있었다. 남편이 이 기간 동안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또 다녀왔던 것 같다. 비용을 어떻게 했는지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항공사에 다니는 시누 덕에 비행기는 거의 공짜였을 것이고, 숙박은 우리 집에서 했으니 거의 돈이 들지 않으셨을 거다. 여행 갔을 땐 우리가 방을 결제했는데 이후 어떻게 정산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계획은 남편이 다 세웠고, 나는 따라만 갔다.  


우리 가족이 다 함께 미국 생활을 시작한 건 8월 초였는데, 시부모님이 다녀가신 건 10월 한 달이었다. 미국생활 초반이기도 했다. 내가 남편과 아이들보다 두 달 정도 먼저 들어와 어학과정을 하는 중에 집과 차를 구하고 필요한 세간살이 세팅을 했다.


우리 집은 싱글하우스였는데 반지하, 일층,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지하에 거실과 방 하나, 일층에 거실, 부엌과 방 하나 화장실 하나, 이층에 방 두 개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일 층이 욕실 딸린 안방이었는데, 우리는 여길 아이들 놀이방으로 쓰고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은 본인들이 그 방을 쓰시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숙소를 따로 잡지 않고 우리 집에 내내 계시게 한 건 잘못했던 것 같다. 나는 내 불편함을 감수하고 호의를 베풀었지만, 시부모님이 가시고 나서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중 가장 크게 싸웠던 것 같다. 거기다 그날은 우리 첫째 생일이었는데, 아이 둘은 일층에서 TV를 보게 하고 이층에서 박 터지게 싸웠다. TV를 틀어놨다 해도 고성이 오갔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불쌍한 아이들,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 날 나를 대하는 남편은 눈이 거의 ‘돌아’ 있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동안 내가 마음이 들지 않았단다. 내가 늦잠을 자는 것도, 그래서 본인이 아이들 아침 준비와 라이드를 도맡아 하는 것도. 남편은 내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 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시부모님을 한 달이나 우리 집에 계시게 했지만 돌아오는 건 그런 거였다. 나는 혹시 해외에 나올 일이 있을 때 다시는 시가 식구들을 집에서 재우기 않기로 결심했다.     


아, 참고로, 친정식구들은 그렇~~~ 게 오라고 해도 한 번을 안 왔다.     

그런데 웃긴 게 남편에게는 우리 집이 나한테 관심 없는 그런 집에 되어버렸다. 남편은 자주 이야기했다.

너희 집은 자식한테 관심이 없잖아. 그래서 웃기지만 나도 내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를 원망한 적도 있다. 우리 엄마를 시어머니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물론 부모님은 건강이 안 좋으셔서 장거리 여행이 어려우신 탓도 있었지만) 그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나의 독립적인 가정을 존중해 주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내가 힘들까 봐 배려하는 마음이었다. 

이걸 암에 걸려서야 깨달았다.


그것도 두 번의 수술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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