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82
CA906. 김형태, 〈물고기 자리〉(2000)
그녀(이미연)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애인과 맞대면한 상황에서 깨어진 유리 파편으로 상처를 입어 손과 발에서 피가 나는 고통을 참는 장면. 영화는 이 대목에서 끔찍한 참극을 교묘하게, 성공적으로 피해 간다.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가 총애했던 미소녀 안티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한 최선책은 남자 곁에 계속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 곁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요컨대 그녀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것은 그녀가 그의 곁을 끝내, 죽는 순간까지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이다. 그녀가 살아서 사랑을 얻지 못한 것은 사랑의 쟁취를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알려준 〈오! 수정〉(2000, 홍상수)의 그녀(이은주)만큼, 아니, 그녀만큼도 ‘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죄가 아니다.
CA907. 이준익, 〈황산벌〉(2003)
삼국시대는 그야말로 ‘끔찍한’ 야만의 시대였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다. 아무리 코미디스러운 설정으로 그 끔찍함을 포장하려 애써도 이 사실에 변함은 없다. 그래서 〈황산벌〉은 매우 ‘슬픈’ 영화다. 온통 패자(敗者)들의 이야기인 탓이다. 계백도 김유신도, 의자왕도 무열왕도, 연개소문도 모두가 다 패자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것이 그 당시 한반도, 우리 민족 실존의 상황이었다.
CA908. 김현정, 〈이중간첩〉(2003)
남도 북도 아닌 경우, 제3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은 이제 더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이는 이미 최인훈이 《광장》의 결말로 알려준, 아니, 증명한 문제다. 남이면 남, 북이면 북, 그 어느 한쪽에 서야 한다. 그것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문제는 그 어느 쪽에서도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도피뿐이다. 한석규가 암살된 것은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도피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그가 브라질에 정착하려 한 것은 ‘실수’였다. ‘브라질’이 아니라, ‘정착’이 문제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실수. 그는 적절한 타이밍으로 거듭 떠나야 한다. 그것만이 그가 살 길이다. 그는 이 점에서 오판을 한 것이다. 아니면, 포기했다고 해야 할까.
CA909. 신승훈, 〈1997 어게인〉(2024)
시간의 비가역성이 양자역학의 개념으로 부수어졌다고 사람들은 정말로 믿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게인’이라는 것이 물리학의 개념이 아니라, 심리학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는 걸까. 우리는 SF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CA910. 앙리 조르주 클루조, 〈디아볼릭〉(1955)
‘악마들(Les Diaboliques)’의 이야기. 언제나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게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치다. 따라서 인간은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무사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요 교훈이다. 하지만 그걸 곧잘 망각하는 것도 인간의 한 가지 본성이다. 그래서 인간사의 모든 희극도, 비극도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맞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