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만한 건 다 아는 열두 살
모름지기 사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고 했다.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이다. 남자는 딱, 이 세 가지 이유 외엔 절대로, 절대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나는 누가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했고 사람들이 왜 그걸 당연시하는지 잘 알진 못했다. 예전에 곡식을 빌리러 이웃집에 들렀다가, 어디서 줘터져 들어왔는지 엉엉 서럽게 울고 있는 어린 손자 놈을 앞에 세워두고 늙은 할배가 하는 말을 우연히 주워 들었을 뿐이다. 난 사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사내애로 태어나지 않은 사실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슬퍼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틀어막으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우리 흥부 아버지는 정말 흉했다. 계집애처럼 흑흑, 흐흐흑 이라니! 다 큰 남자 어른이 나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눈물, 콧물 쏟아내며 우는 꼴이 괴상했다. 나는 잠시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져서 멍청하게 서 있다 순간 정신이 들어 고갤 이리저리 흔들었다. 혹여 문 밖에서 동생들이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당장 아버지의 울음을 멈춰야 했다.
- 아부지, 아부지! 왜 우셔여? 제가 이거 죽, 먹겠다고 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알았어여, 제가 참말로 잘못했구 만여! 제가 요 죽을 도로 따따시 뎁혀 갖고 올텐께, 고거 잡숫고 진정하셔여. 제발 고만 좀 우셔여어!
- 흑, 용순아, 그런 거 아녀. 배가 고파서 그런 게 아녀, 흐흑! 내가 요새 왜 이러는지 나도 몰겠구먼, 흑흑!
긁어 부스럼이라고, 그냥 내버려 둘 것을, 괜히 아버질 달래겠다고 덤빈 걸까. 만약 앞 뒤 사정 모르는 사람이 구슬피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면 벌써 먼 옛날에 돌아가셨던 조부모님이 또, 돌아가신 줄 오해할 판이었다. 한참 그렇게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내 모습을 힐끗 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울음을 뚝 멈추더니 날 향해 나직이 말했다. 용순아, 이리 온. 아비는 괜찮은께 내 옆으로 와서 앉어.
그때 나는 골치가 아파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던 참이었다. 이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 곁으로 살금살금 조심스레 다가갔다. 눈두덩이 벌게진 아버지가 상체를 곧추세우고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며 가부좌를 틀었다. 어린 딸내미 앞에서 모양 빠지게 마냥 엉엉 울고 있을 순 없을 테니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진정한 듯 보였다.
- 고놈 잘 날아갔겄지? 바닥에다 양다리를 힘차게 디디고 날개를 펴야 하늘 높이 떠오를 터인디. 말짱히 나아서 돌아가야 다른 제비들 헌티도 서러움 안 받고 잘 살 거 아녀. 병든 몸뚱이로 돌아가봤자 괴롭힘 당하고 오래지 않아 죽을게 뻔한겨.
- 아부지는 제비가 고로케롬 조아여? 걱정돼서 눈물이 나올 만큼......?
- 푸핫, 뭔 소리여.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울긴 뭘 울어.
- 에에이? 좀 전까지 서럽게 흑흑, 우시던 양반이? 하, 난 또 아부지가 안 드시고 나둔 죽을 들고 나간다구, 서러워 우시는 줄 알았져. 나참, 사실은 제비 걱정돼서 우시는 거였잖여.
- 용순아, 아부지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잠깐 그런겨. 집 떠나서 춥고 배고프고 아프기까지 해서 서러웠던 거, 그랬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 춥고, 아니, 지금은 봄이라 춥진 않은께, 아무튼 배고프고 아픈 건 지금도 매한가지 아닌감여? 아부지는 맨날 아프시니께.
- ......
난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버질 향해 툭 던지듯 대거리했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느닷없이 한방 얻어맞은 얼굴로 빤히 날 쳐다봤다. 아랫입술을 헤벌리고 두 눈동자는 잠깐 영혼이 빠져나간 듯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때, 작고 어렸던 셋째 딸내미가 언제 이렇게 훌쩍 컸나 싶으셨을까. 아부지, 아부지가 잘 몰라서 글치, 난 벌써 열두 살 이라구여. 이제 알만한 건 다 아는 열두 살여.
아버지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삐쩍마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번 내 머릴 쓰다듬던 손이 내가 좀전에 갖고 나가려다 방바닥에 내려놓은 죽그릇을 향했다. 그릇을 당겨 와 내 두 손에 얹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얼른 이거 가져다 동생들이랑 나눠 먹어, 용순이 너헌티 아부지가 참말로 미안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