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이 비춰도
어느덧 유난히 춥고 혹독했던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입춘이었다. 뒤늦은 꽃샘추위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켜켜이 쌓여 있던 개울물이 드디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새파랗고 청명한 하늘 아래 맑고 온화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산과 들, 산골마을 이곳저곳을 새색시 치맛자락 마냥 나풀나풀 떠다녔다. 뉘 집 뒷마당에선 묵은 된장 냄새가 장독 뚜껑 틈으로 꿈꿈 하게 풍겨져 나왔고, 누군가 부지런히 제 집 마당을 야무지게 비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괜스레 가슴이 뛰고 명치 아래가 간지러운 봄날 아침이었다.
나는 마당에 있는 큰 감나무 앞 평평한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서 옆으로 길게 드리운 가지 위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새순이 돋았으려나 싶어, 한 손을 쭉 뻗어 초록빛이 감도는 마디 끝을 더듬어보았다. 아직 이른 탓인가 밋밋하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실망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부엌 안에서 부뚜막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가마솥뚜껑을 반쯤 열어 안을 들여다본 후에 땅이 꺼질 듯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그날 아침 끼닛거리를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김없이 올해도 보릿고개가 코앞에 닥쳤다.
따뜻한 봄이 찾아왔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한겨울 냉기가 흘렀다. 이미 웬만한 주변 이웃한테는 싹 다 곡식을 빌린 터라 이젠 정말 더 이상 손 벌릴 곳이 없었다. 아침 일찍 큰 언니와 둘째 오빠가 조금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로 일거리를 알아본다며 나갔다. 하나 사실 좋은 소식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듣고 있던 작은 언니가 마루에 앉아서 전날 하다 만 바느질감을 붙잡았다. 나는 눈치껏 얼른 언니 곁에 다가가 앉아 같이 바느질을 시작했다. 이젠 나도 제법 능숙해져서 훨씬 빠르게 손을 놀려 꼼꼼하게 바느질을 했다. 언니 곁에서 말없이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으니 잠깐이나마 배고픔을 덜 느꼈고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곧 바느질을 끝내고 나면 밖으로 나가 먹을 걸 구해봐야겠다 생각을 하던 때, 아버지가 마른기침을 하면서 안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렇게 색이 바래 낡고 남루한 도포를 챙겨 입고 있었다. 총모자 옆 부분이 구겨져 찌그러진 흑립을 들고 있었는데 손으로 거길 슥슥 다듬더니 머리에 정성껏 눌러썼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알 수 없는 근엄과 비장함을 느꼈다.
이 아침에 아버진 무슨 일로 저리 차려입고 대체 어디로 출타하시려는 걸까.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재빨리 아버지의 낡은 가죽신을 챙겨 나와 쌓인 먼지를 입으로 후후 불어 털어내고 아버지 발치 아래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날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버지의 눈길이 잠시 신발로 가 닿았다. 아버지가 다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면서 신을 신은 후, 부엌문 앞으로 황급히 나와 선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 내, 형님 댁에 잠시 다녀오겠소잉.
- 아니, 그 댁에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고! 형님이란 분은 남보다 못한 사람 아니유.
- 오늘이 형님 생신일이잖여. 감축드릴 겸 음식도 얻어올랑게.
- 그 부부 내외가 어지간히 잘도 반겨주겠소. 몰매 안 맞으면 다행이지, 어찌 거길 가슈.
어머니와 작은 언니가 아버지를 만류하려 앞을 막고 섰는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알아챈 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옆에 붙어 서서 의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놀부, 그러니까 아버지의 형님인 큰 아버지는 지난번 설 명절이라 찾아갔을 때 우리 식구들을 아주 매몰차게 쫓아낸 사람이었다. 동네 상거지가 찾아왔어도 그리 박대하진 않을 텐데...... 명절 제사를 위해 마련했을 음식이 풍족했음에도 밥은커녕 물 한 사발도 주질 않고 우릴 내쫓았다. 아, 양동이에 담긴 물로 한 대박 세례를 맞고 나왔으니 나름 대접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허어! 여하튼 우리 모두 정초부터 비 맞은 개꼴을 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집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런 푸대접을 받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거길 또 찾아가겠다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극구 뜯어말리고 싶어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결연한 표정을 지은 아버지가 자신 앞을 막아선 어머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양 미간이 찌푸려진 어머니가 노여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인정머리 없이 못된 형을 찾아가서 어쩌자는 것인지?
- 이참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내게 남기신 땅에 대해서 담판을 지어올터이니 임자는 걱정 말고 기다리소잉.
- 저, 저도 아부지 따라갈라요! 큰집 아부지 성격이 보통 아닌디, 일이라도 당하믄 어쩐대여!
- 이잉? 용순이 니가?
- 혹시 아부지한테 뭔 일 있으믄 저라도 소식 전하러 쫓아와야잖여. 저 이래 봬도 달리기 하난 기똥차게 날아다녀여!
겁 없이 어린 계집애가 덜컥, 같이 가겠다 나서다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언니가 놀라고 어안이 벙벙했는지 날 쳐다보며 말을 못 했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봇짐에다 여러 군데 덧대 꿰맨 버선 한 켤레, 여벌의 옷도 챙겼다. 혹여 지난번처럼 또, 물세례 맞을 경우 갈아입을 심산으로 단단히 채비를 했다.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못된 영감탱구,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을 것이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