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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작소설

태어나보니 흥부네 셋째 딸_10화

타오르는 불씨

by IndigoB

큰 아버지가 움켜잡은 떡메 몽둥이를 절구통에 던져 놓고, 팔꿈치까지 둥둥 걷어올린 소매를 도로 내리면서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역시 지난번처럼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말 한마디 조차 하지 않았다. 우릴 노려보며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이 마뜩잖아 죽겠다는 눈빛으로 마루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아, 곰방대 주둥이에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큰 아버지가 뻑뻑 소리 내며 곰방대를 몇 번 빨아 당기자마자 금세 온 사방이 담배 연기로 매캐해졌다. 아버지와 나는 대청마루 밑 디딤돌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불편함을 참다못한 아버지가 큰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 형님, 가내 평안하시고 강건하셨지라? 생신날이라 떡 만드는 중이셨는갑소. 아따, 고 떡 맛나거따!

- 남이사 떡을 맹글던 말던, 나 지금 무지 바쁘니께 용건만 싸게 말하고 가거라잉.

- 거참, 생신 축하하러 온 동생헌티 너무 매정하구마이. 긴히 헐 얘기도 있고 하니 내 잠깐 올라가겠소잉.

- 히잉, 어딜 올라오겠다는겨? 그냥 거기서 얘기하랑게!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대청 위로 발을 들이밀고 올라섰다. 큰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더니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거머쥐고 번쩍 들어 아버지를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난 잽싸게 온몸을 날려 마루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연이어 들고 있던 옷 보따리를 방패처럼 내밀어 곰방대를 치켜든 손을 막아섰는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차려보니 아버지가 뒤돌아 고갤 숙인 채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사이 내 옷 보따리에 부딪힌 곰방대가 공중으로 휙 날아갔는데, 그게 하필이면 큰 어머니 이마 언저리에 정확하게 툭 떨어졌다.


- 아야야야얏! 아이고,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여. 아이아야야!

- 임자, 괜찮여? 아니 왜 거 짝으로 날아간겨.

- 이를 어째여. 형수님, 많이 다치셨소?

- 아부지! 아부지 다친데는 없어여?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여.


다행히 아버지는 무사했다. 큰 아버지와 아버지, 두 형제가 큰 어머니 상태를 살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난 미안하다거나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를 려고 덤비던 큰 아버지 때문에 사달이 난 것인데, 난 그저 아버지 지키려고 나선 것뿐, 어디까지나 내 행동은 정당방위였다.


쫘악!


하지만...... 놀부, 큰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커다랗고 우악스러운 손이 내 뺨을 아주 야무지게 가격했다. 나는 뺨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보다 일순간 귓가에 울려 퍼진 쫙, 하는 소리에 더 놀랐다. 마르고 왜소한 내몸에까지 충격이 전해져 나는 대책없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픽 쓰러지고야 말았다. 후끈하고 얼얼해진 뺨을 감싸고, 슬며시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큰 아버지가 내게 성큼 다가와 한번 더 크게 손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 짧은 찰나 나는 본능적으로 고갤 휙 돌리고 몸을 숙이면서 바닥에 웅크렸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아버지가 큰 아버지가 휘두르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가 날 살렸구나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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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님! 울 용순이가 뭘 잘못헜다고 그러신데여? 지 아부지가 다칠까봐 나선 것인디.

- 오냐, 말 한번 잘했다. 애당초 내 말을 무시하고 덤빈 놈이 누구여, 이잉!

- 형님이 지한테 그러시는 건 참을 수 있소만, 지 딸내미한테까지 함부로 하시믄 곤란하지라.

- 아니, 이놈이! 정신이 헤까닥 한겨? 니 딸년 때문에 다친 형수가 안 보이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 축하해 주러 온 동생을 박대하면서 때리는 형님이 세상천지에 어딨소? 하, 내가 말 안 하고 당하고 있은께, 사람을 무슨 등신 속 고쟁이로 아는가 벼!


나는 여태껏 봐 왔던 아버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 흥부 아버지한테서 이런 과격한 면이 있었다니! 그동안 병약해서 비리비리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어디로 간 걸까. 참으로 신기했다.


- 아부지, 아부지! 전 괜찮아여. 하나도 안 아파여. 그니께 고정하셔유, 네?

- 용순이 니는 나서지 말고 저짝에 가 있어. 아부지가 다 알아서 할 거니께.

- 큰 아부지! 제가 잘못했슈. 큰 아부지도 그만 좀 고정하셔유.


몇 발짝 물러서 상황을 지켜보던 큰 어머니가 안 되겠다 싶은 지 잰걸음으로 쫓아 올라와 큰 아버지 옆으로 버티고 섰다. 쪽진 이마엔 밤톨만 한 혹이 불룩하게 부어올라 있었는데, 황소 같은 숨소리가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 말고 딱히 안 좋아뵈는 데 없이 멀쩡해 보였다. 쇠붙이로 된 곰방대로 맞았으니 꽤 아팠을 텐데 머리가 아주, 많이 단단한 게 아닐까 싶었다. 큰 어머니의 양쪽 입꼬리가 심술맞게 밑으로 축 쳐져서 씰룩이는 게 금방이라도 모질고 독한 말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대? 애비나 그 딸년이나 버릇없이 구는 건 매한가지구먼. 하는 짓이 상것들과 다름없소.

- 원래 저 놈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놈이제. 눈치도 없이 마누라랑 애 새끼들 줄줄 달고 대뜸 찾아오질 않나, 지금도 보소! 지를 언제 불렀다고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얼토당토 않게 이런 행패를 부리고 말여. 에잇, 저 딸년도 못 배워 먹어서 저런겨!


두 내외가 주고받는 비아냥 섞인 말이야말로 얼토당토 않는 억지 소리가 아닌가. 잔뜩 화가 난 아버지의 눈이 벌겋게 노여움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고개를 아래로 깊이 떨구고 양팔에 힘을 준 채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부르르 떨었다.


큰 아버지 내외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도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좀전까지 떡을 치던 절구통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네 까짓게 뭐, 어쩔 건데?' 하는 듯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도 화가 치밀고 속이 몹시 아렸다. 분명 아버지는 나와 비슷한, 어쩌면 훨씬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나는 짐작했다. 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다가 '이러다 진짜 무슨 사달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었다. 내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더이상 이대로 지켜볼 수 없구먼. 어서 아버지를 말려야 혀!)


머릿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니 등에서 식은 땀이 나고 가슴팍에서 뜨겁고 어지러운 기운이 훅 올라왔다. 도대체 이 불을 어찌 해야 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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