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봉 감독님, 왜 17이 된 거죠?

세상에 당연히 죽어야 할 노동자는 없다

by IndigoB

현재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내란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게다가 미국 트럼프 정부가 다시 집권하며 이기적이고 무도한 관세 정책을 펼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이슈로 온갖 나라 안팎이 혼란한 정국에 빠졌다.


그 와중에 한국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무맹랑한 사태가 발생했다. 올바르지 못한 사고와 판단으로 어이없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지금도 하루하루를 힘들게 견디며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구체적 근거 없이 떠도는 가짜 뉴스와 망상의 늪에 빠져 서로를 적으로 내몰고 길거리에서 대치하며 싸운다. 돈에 미친 선동가가 국민들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 혐오의 씨앗을 심고 분노로 키워 표출하라고 부추긴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결국 그들의 목적은 돈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 수 있음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현혹되고 있다. 정치 선동에 혈안이 된 자칭 애국자는 부디 본래 자리로 돌아가 종교인으로서 품위와 본분을 지키길, 어서 빨리 이 혼란스러운 정국이 안정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봉준호 감독 신작 [미키 17]이 영화 팬들을 찾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92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지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한국은 영화, 드라마, 케이팝, 케이푸드, 케이뷰티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피, 땀, 눈물을 희생하며 일하고 노력한 결과, 짧은 기간에 양적인 성장을 빠르게 이룬 한국 사회에 대한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반도체, IT 기술 외에 문화, 예술, 스포츠, 음식까지 점점 관심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최근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진행하는 영화 관련 TV 프로그램에 봉준호 감독과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함께 출연해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았다. 영화 홍보를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는 로버트 패틴슨의 표정이 천진한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고 들떠 보였다. 아직 맡은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표정과 말투에서 주인공 미키의 익살과 능청이 묻어났다. 봉 감독과 주연 배우가 함께 영화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 듯 보였다. 다소 엉뚱하고 기발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인물 표현과 대사, 장면을 논의하고 연구했던 그들 간에 값진 시간이 얼핏 엿보였다. 배우는 감독을 'Bong'이라 부르고, 감독은 배우를 'Rob'이라 불렀다.




남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어 죽게 되면, 같은 유전자로 생체 프린터에서 반복재생되어 부활하는 'Expendable' 요원, 미키 반스.



익스펜더블, 본래 뜻은 '군사 소모품' 혹은 '소모형 용병'을 칭하는 말이다. 한번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소모품을 가리키는 'Expendable'이란 말을 사람에게 할 수 있다니! 사실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랍다.


자연스럽게 봉 감독에게 던져진 질문.


'원작 소설의 제목은 미키 7인데, 봉 감독님의 영화는 미키 17이네요.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있을까요?'


'에드워드 애슈턴 원작소설 '미키 7'에선 미키는 7까지 재생되는데요. 제 영화에서는 미키는 1에서 17로 반복 재생되었다가 실수로 18까지 생체 프린터가 됩니다. 저는 17이라는 숫자가 18세 성인이 되기 바로 직전 즉, 완성의 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합니다. 미키는 처음 죽음을 맞이해서 2로 부활되었다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또 죽고, 전임자의 기억과 같이 또 재생되어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엔 프린터 된 지 15분 만에 죽는 황당한 장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개척지로 도착한 얼음 행성에 존재하는 미지의 바이러스에 의해 재생되자마자 발작을 일으켜 죽는 거죠.'



과연 이런 생체 재생 기술이 미래에 존재할까 싶다가도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인공 치아, 뼈와 관절을 만드는 기술이 이미 지금의 세상에 존재하는데, 만약 인간복제 재생기술이 가능하다면 생체 피부와 장기, 뼈, 관절은 물론이고 혈관까지 못 만들 것도 없겠지. 아, 두뇌세포까지 재생할 수 있다면 게임 끝이지 않은가. 카테고리가 유전공학인가, 생명공학인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릴 미지의 과학인가. 정말 이런 인간복제기술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더이상 자식을 낳을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겠지.



친구와 함께 동업을 하다 실패하고 거액의 빚더미에 올라간 미키 반스. 그를 쫓는 사채업자 다리우스(변태 노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행성 이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지구를 벗어나려는 막장 인생들이 길게 늘어선 대기줄을 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엔 마음이 급해진 미키는 '익스펜더블'에 자원한다.



과연 앞으로 겪게 될 일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린 즉흥적 결정이었다.



미키는 반복재생을 거치면서 매번 같은 성격과 기질로 태어나지 않는다. 똑같은 유전자로 태어남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성격과 기질이 다르다니 마치 복불복 게임을 하듯, 점괘를 뽑듯이 프린터기에서 미끄덩한 질감으로 찍혀 나온다. 'Rab'이 재미있는 무용담을 늘어놓듯 했던 말처럼, 프린터 배출구에 '거치대'를 받쳐놓지 않아 미키의 몸뚱이가 바닥 아래로 축 늘어져 속수무책으로 방치되는 장면이 깨알 웃음을 준다. 또한 최대한 사실적 디테일을 살리는, 봉준호스러운 장면을 더 꼽자면 프린터기가 작동하는 와중에 미키의 몸이 배출구 밖으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며 걸리는 장면이다.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한 번쯤 잉크젯 프린터를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했을, 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깨알 웃음 포인트.


지구가 아닌 행성에 이주, 정착을 목표로 마샬 사령관(선동가이자 독재자) 지휘하에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개척단. 지구에서 가져온 식량과 자원이 부족해서 하루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턱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는 것이었다. 이전 작품 [설국열차]에서의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이 떠오른다. 한정된 자원, 돈과 계급에 따른 불평등, 어리석은 광기로 가득 찬 독재자가 저지르는 억압과 부조리한 폭력, 관료와 마약조직의 부패 카르텔 등......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가 이번 영화에도 뚜렷하게 보였다.


마샬 사령관과 그의 아내 일파

블랙코미디의 유머 때문에 깔깔 웃지만, 커피 잔 바닥에 가라앉은 미분가루처럼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사뭇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 보여 씁쓸하다. 어찌 된 게 요즘은 현실이 더 막장이고 참혹하다.



미키는 재생되어 살아 돌아올 때마다 매번 동료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미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죽을 때 기분이 어때?'


죽어도 매번 생체 프린터로 재생되니까, 그러라고 존재하는 익스펜더블이니까 이런 무례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미키에게 저 질문을 하는 씬이 꽤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죽을 때마다 어떤 기분인지 묻기 앞서 먼저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같은 인간이면서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할만한 질문이 분명 아닐 것인데. 필자는 누가 바늘로 콕 찌른 것처럼 마음이 따갑고 불편했다. 아마도 봉 감독이 의도한 게 이런 것이겠거니 추측한다.



죽음의 사명을 지닌 복제인간에게 자발적이기는 하나 비윤리적인 실험을 하고, 그렇게 얻은 데이터로 연구를 해서 성과를 얻는다. 과연 우린 복제인간에 대해 윤리, 인권, 생명 존중 등을 어떻게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이런 발상에 대해 장차 미래에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중 하나라 우기고 싶다.


현재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학습을 통해 빠르게 인간과 거의 유사한 생각과 판단을 하게 될 만큼 똑똑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어쩌면 한 2, 30년 뒤 가까운 미래에는 위험하고 힘든 노동 대부분을 로봇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좀 더 편하고 안전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일 경우에 직접 인간에게 임상을 해볼 수 없으니 누군가 복제인간을 만들어 실험을 하겠다 나서서 실행한다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딜레마이다.



만약 세상에, 당연히 죽어야 할 노동자가 있다면?


노동이란 무엇일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일하지 않는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해 하층 노동자가 시간과 노력을 제공하면서 일한다. 그리고 일한 대가로 돈 혹은 상응하는 뭔가를 얻는다. 대가의 양과 정도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 상대적 평가를 통해 상호협의 하에 고무줄처럼 탄력적이다. 심리적 위축되고 여유가 없는 쪽이 주로 피고용인, 즉 노동자이므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노동자는 거의 항상 '을'이 된다. 일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입장에 놓인다. 노동의 수요보다 공급이 늘 넘친다. 노동자가 귀한 대접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하다가 더 이상 일할 이유와 능력을 잃으면 가차 없이 교체된다. 기계 부품, 소모품처럼 버려진다.



먹고살려고 뛰어든 생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아등바등 안간힘을 쓰다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종종 뉴스 보도에 나온다. 산업현장 중대재해법이 강화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은 노동자가 너무 많이 죽는 국가다. 떨어져 죽고, 끼어서 죽고, 빠져서 죽고, 깔려서 죽는 등등 일하다 사망한 사례가 왜 이리 빈번한 것일까. 갈수록 인구수가 줄어 4천만 명 수준이 된 이 마당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지 않은가.


세상에 당연히 죽어야 할 노동자는 없다.



미키 17은 사람들이 죽는 기분이 어떠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진짜 어떤 기분인지 말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차피 내가 매번 죽는 순간 겪는 무서움을 진심으로 공감해 줄 사람은 애인 '나샤' 말고 아무도 없을 테니.


꽤 여러 번 겪어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죽을 때마다 매번 무서웠어.




유한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미키는 어쩌면 앞으로 재생될 예정이었던, 미키 17 이후 미래의 미키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진다고 내레이션이 나온다. 정말 쓸데없이 착해빠진 미키 17은 미키 18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직 원작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채 영화를 먼저 관람했다. 알고 보면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인데 원작 소설은 그런 점에서 더 무겁고 진중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영화로 각색했을 때의 미키를 먼저 접했으니 막상 책을 읽고 나면 어떤 느낌일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한 화면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미키를 잘 소화해 낸 주연배우 로버트 패틴슨

미키 17, 18역을 동시에 다르게 소화해 낸 로버트 패틴슨이 신기했다. 두 미키를 서로 다른 성격으로 연기하느라 엄청 힘들었을 듯한데 꽤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다.



마샬 사령관 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 파시스트의 광기 어린 눈빛 연기가 색다르다. 거기에 곁들여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소스(?) 제조에 혈안인 마샬의 아내 '일파'에게서도 한 광기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영화 [설국열차]에 서 배우 틸다 스윈튼이 연기했던 뻐드렁니 총리를 떠올렸다. 반가운 배우, 스티브 연도 미키의 친구 역으로 출연한다. 조연 배우들도 나쁘지 않다. 전반적으로 신선한 소재, 오락성, 메시지 전달도 괜찮았다. 만약 여태껏 봉준호 감독 작품을 빠짐없이 챙겨본 사람이라면 그의 전작에서 보았던 특징들을 이 영화 [미키 17]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내 멋대로 주관적으로 후기를 썼다.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에게 스포일러 하는 어마어마한 만행을 저지르지 않고자, 구체적인 내용은 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봉감독을 향한 팬심을 담아 한마디 남긴다.


디렉터 봉, 이번 영화 찍느라 고생했어요. 다음 작품도 기대할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젠 얘기할 수 있어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