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여, 미워도 다시 한번
시종일관 홀대하며 꽥 소리만 지르던 큰아버지가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아버지와 내 몫의 밥과 국을 더 가져오도록 시켰다. 큰어머니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구시렁대며 부엌에 다시 들어갔다. 나는 큰어머니를 뒤따라 들어가 새로 밥상 차리는 것을 도왔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집에서 내외 둘이서만 생일상을 차려 먹으려니 좀 허전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밥상 둘에다 따로 두 사람 씩 나눠 각각 밥을 차렸다. 상위에 밑반찬과 함께 간장 양념으로 조려 익힌 닭고기 조림이 올라왔고, 노르스름한 콩고물을 소복하게 묻힌 인절미도 올라왔다.
아버지와 내가 끙끙 앓으며 떡메를 치고 뒤집어서 만든 떡을 바라보자 새삼 지난 고생이 떠올라 눈에 물기가 살짝 고였다.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쌀밥과 고깃국에서 풍겨오는 구수하고 달큼한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의 서러움은 어데 가고 난생처음으로 받아보는 호사로운 밥상에 가슴이 막 벅차올랐다. 눈 아래 차려진 음식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아버지 표정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녀가 유별하여 남자는 형제끼리, 여자는 큰어머니와 내가 상을 따로 놓고 앉았다. 큰아버지가 말 한마디 없이 먼저 수저를 들어 밥을 뜨려고 했고, 그 순간을 놓칠세라 아버지가 서둘러 축하의 말을 건넸다.
- 형님, 생신 감축드리고 앞으로도 무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요. 함께 식사하는 게 이 얼마만인지...... 감개가 무량하지라.
- 어이구, 내가 너 이뻐서 귀한 쌀밥과 고깃국을 덥석 내주는 줄 아느냐. 네 놈이 자꾸 찾아오는 통에 미운 놈 떡 하나 물리고 쫓아낼 심산으로 이러는 것이니, 먹을 만큼 먹고 쥐도 새도 모르게 얼른 사라지거라잉.
- 네에, 형님 덕분에 오늘 배불리 실컷 잘 먹겠습니다요. 허허허!
아버지는 배알도 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큰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도 두 형제가 함께 밥을 먹은 지 한참도 더 됐을 텐데, 밥상을 앞에 놓고 두 아버지가 서로 마주 앉은 모습은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아주 감동적이고 고무적인 순간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난, 큰아버지가 그리 막 돼먹은 형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고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다.
아버지가 수저를 집어 올리면서 고갤 돌려 날더러 어서 먹으라는 눈짓을 했다. 잔뜩 굶주려 있던 나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밥과 국을 허겁지겁 떠먹었다. 놀랍게도 나의 맞은편에 앉은 큰어머니가 이미 그릇에 담긴 밥을 반 이상 해치우고 있었다. 벌써 닭고기 조림이 동이 나기 일보직전, 서너 조각만 남았다. 나는 남은 고기반찬을 흘깃 쳐다보며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고깃 조각에 시선을 꽂은 채 허둥지둥 입으로 밥과 국을 미친 듯이 밀어 넣었다. 큰어머니는 음식을 제대로 씹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음식들을 커다란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큰어머니는 그런 기름진 음식을 매일 먹을 텐데도, 일부러 날 골탕 먹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문득 두 시진 전 발생했던 곰방대 투척 사건이 떠올랐다. 수저가 그릇과 접시를 오가며 내는 쨍강, 하는 소리만이 어지럽게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거무튀튀한 양념 국물이 물 웅덩이처럼 그득한 보시기 한가운데에 닭다리 조각이 하나 달랑 남았다.
순간 내 두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고 잽싸게 젓가락 잡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이번엔 내가 빨랐다. 기어코 마지막 한 조각을 사수한 것에 기뻐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실룩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작고 힘없는 내가 큰 어머니를 감당하기엔 벅찼다. 화난 기색이 역력한 큰 어머니가 보시기 그릇을 자신 앞으로 우악스럽게 확 잡아당겼다. 이내 밥상 가장자리가 들리면서 한 곳으로 기우뚱해졌다. 덜컹이는 밥상 위에서 내 젓가락 두 짝이 휙 튕겨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그릇과 함께 제멋대로 들썩였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닭고기 한 점은 결국 바닥에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 어허! 체통 없이 밥상머리에서 뭐 하는 짓이여? 임자, 어서 찬 냉수나 좀 떠 오소!
큰아버지가 부산스러워진 분위기를 못마땅해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의 말투에서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엄청난 식탐을 부리는 큰어머니 보다 불청객인 아버지와 나를 더 탓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등뒤에서 식사 중이던 아버지가 숟가락을 살포시 내려놓고, 고갤 들어 건너편 어딘가를 유심히 살폈다.
- 그러나 저러나, 형님! 진작부터 여쭤보고 싶었습니다만, 일 하던 아랫사람들 다 어데 가고 집에 아무도 없...... 형님 댁에 뭔 변고라도 생긴 겝니까?
- 어허! 변고는 무슨 변고! 밥 다 먹었음 그만 썩 돌아가거라!
- 허참, 어찌 이리 역정을 내십니까여? 저 형님 아우, 흥부 아닙니까? 형님께 무슨 일이 있다믄 아우인 제가 응당 알아야 도리지요!
큰아버지는 방심한 틈에 정곡이라도 쿡 찔린 것처럼 불 같이 화를 내며 성급히 우릴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순순히 물러날 기색 없이 형에게 끈질기게 연유를 묻고자 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닭 조각을 아쉽게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생고집을 부리는 아버지에게 그만하시라 말하고 싶었다.
평소 아버지 라면 서슬 퍼런 큰아버지 호통에 꽁무니가 빠져라 벌써 도망갔을 텐데, 그날따라 완고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으신가 하고 무척 궁금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금세 험악한 분위기로 바뀔 것만 같았다. 불과 두어 시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또 일어날까 불안해서 다시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 이 놈이 웬일로 형님, 아우 하며 걱정을 다 하는 겨? 내게서 그렇게 줘터지고도 날 형님으로 여기다니 네 놈 속도 참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