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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작소설

태어나보니 흥부네 셋째 딸 15화

그 노인은 왜

by IndigoB

- 에헤, 에헴! 남의 얘기 몰래 훔쳐 듣고, 부녀끼리 참 잘하는 짓이유! 거기 쥐새끼처럼 붙어섰지 말고 이리루,나와보슈.


아버지가 민망해 멋쩍어하며 문에서 물러섰다. 나도 뒷걸음치면서 물러서다가 그만, 등뒤에 바짝 다가온 큰어머니와 어깨를 부딪혔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작은 찻상을 든 채 양손을 문고리 쪽으로 내밀며 나에게 문을 열라는 눈빛을 보냈다. 방문을 열자 큰어머니가 잽싸게 차와 떡, 다과를 차린 상을 들였다. 문 너머 방안이 들여다보였다. 바로 보이는 벽에 화려한 산수화를 그려놓은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큰아버지가 앉았고, 바로 맞은편에 형방이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 요즘 현감 나리는 무탈히 잘 계시는지? 근래 경황이 없어 현감을 찾아뵌 지 한 달이 넘은 것 같소잉. 자, 자, 차와 다과를 들면서, 저희 집에서 일어난 망측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요.


사건? 분명 사건이라고 들었다. 나와 아버지의 눈동자가 동시에 반짝이며 마주쳤다. 큰어머니가 멀뚱히 서 있는 나와 아버지를 보고 급히 문을 벌컥 닫았다. 하마터면 문짝에 부딪칠 뻔했음에도 아버지와 난 좀처럼 문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되레 그 사건의 내막(?)에 대해 알고 싶어 얼굴을 더 가까이 밀착하고 쪼그려 앉았다. 한편, 포졸 둘이 멀찍이 마당 한구석 깔아놓은 멍석 위에 퍼대고 앉아 우릴 힐끔 쳐다보았다. 자기들끼리 나직이 소곤대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AI 이미지 생성 - Microsoft Copilot


- 지가 말이오,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인디... 행랑아범은 제 부친 살아생전부터 오래 일했던 노비였습지요. 여태껏 큰 문제없이 성실하게 일한 터라, 지가 그나마 제일 믿고 집안 대소사를 맡겼었는디... 아니, 이것들이 한통속이 돼갖고 이래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참말로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오잉!


- , 본시 한 곳에 고인 물은 언젠가는 썩는 법이니께. 너무 그 노인을 믿은 게 화근이라면, 화근인게지여. , 그나저나 놈들이 훔쳐 달아난 재물이 소상히 뭣이 있습니까요?


엿들은 대화를 풀어보자면 큰아버지가 오래 믿고 맡기면서 부리던 노비, 나도 몇 번 본 적 있어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행랑아범이 노비들과 함께 작당모의해서 재물을 훔쳐 싹 다 달아났다는 이, 나와 아버지가 무척 궁금해했던 그 일의 내막이었다.


윗전에 늘 순종적이고 수더분했던 그 노인이 왜 그같이 대담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 지난 설 명절에 우리 식구들이 모진 수모를 겪으며 쫓겨나다시피 할 때에, 행랑아범은 우리 식구를 위해서 명절 제사상을 물리고 나온 음식 중 일부를 큰아버지 몰래 챙겨주었더랬다. 노인은 음식을 싼 보따리를 건네며 '아랫것들이나 먹을 찌꺼기 음식'밖에 주지 못해 무척 미안하다고 했다. 우릴 보고 여러 번 허리를 숙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고맙던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물세례를 때려 맞아 바들바들 떨면서 행랑아범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노인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작은 서방님, 즉 아버지를 잘 챙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음 여리고 물정 몰라 남에게 당하기 딱 십상인 아버지의 심성을 할아버지도 일찍이 알아보셨던 게 아닐까. 별 볼 일 없이 가난한 우릴 보며 제 주인처럼 야박하게 굴지 않았고, 오히려 안쓰러워서 뭐라도 챙겨주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래서 고마웠던 행랑아범이 도대체 무슨, 아니 어떤 마음으로 평생 모시던 주인집에서 달아났을까? 그것도 노비들을 몽땅 데리고 야반도주했다니. 아버지가 도무지 가늠하기 힘들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허공을 쳐다보고 고갤 주억이며 뭔가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 뭔 사연이 있는 게 분명혀. 암, 그럴만한 까닭이 있으니께 그리 간 큰 일을 벌였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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