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코가 석자(三尺)일까
도망친 노비들이 훔쳐 달아난 재물에 관해 형방이 자세히 물었지만, 큰아버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영 시원치 않고 흐지부지했다. 큰아버지는 그저 은자 몇 냥과 패물 몇 가지, 쌀 한 두 가마니 정도를 거론하며 이상하게 말끝을 흐렸다. 대신, 당장 수족처럼 부릴 노비가 없어 겪는 불편함과 답답한 심정을 매우 강한 어조로 하소연했다.
이제 봄이 되어 곧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소작농은 어찌한다손 치더라도 겨울 내내 얼었다 녹은 땅을 일궈낼 일꾼을 먹일 음식과 소여물은 누가 해다 댈 건가. 큰어머니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안방 문 밖까지 들렸다. 그저 아랫사람을 부리는데만 익숙했던 두 사람 눈 앞이 암담할 게 불 보듯 뻔했다.
- 저 또한 영감님과 부인이 겪으실 고초가 참으로 극심할 거라 예상됩니다만, 당장 그놈들을 바로 잡아오긴 힘들겠습죠. 요즘 부쩍 영감님 댁 외 다른 대감님들 댁에도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디... 솔직히 관아에서 이 사건들을 미처 다 쳐내지 못해 골치를 않고 있는 형편입지요.
큰어머니가 둘이 나누는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다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 아니, 현감께서 해결하지 못하시믄 우린 도대체 어쩐대요? 아이고! 현감 나리와 관아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디. 이래 억울하고 황망할 수가!
- 부인, 송구하기가 이를데가 없구만요. 우리 현(縣)에서 나름 한다고 하는디, 워낙 갑자기 사건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터지는 바람에 뭐,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지요. 보다 못한 다른 댁은 추노꾼을 따로 고용해 도망친 노비들을 쫓고 있다 들었습니다요.
- 어허, 임자는 가만있으소! 형방, 내 이런 황당한 답을 들으려 관아에 고변한 게 아니지 않소잉. 현감 나리가 어찌 이런단 말이오, 그동안 내가 챙겨드린 게 얼만데!
- 영감님, 저희가 그냥 손 놓고 있겠다는 말이 아니고, 자자, 너므 흥분하지 마시고! 부디 노여움을 내려놓고 제발 고정하시오잉. 쩝, 지가 돌아가믄 현감께 다시 한번 더 말씀드려 보고 조속히 해결되는 방향으로다 힘써 볼란께요.
대화가 잠시 끊겨 조용한 듯하다가 이내 안방 문이 활짝 열렸다. 형방이 도포 소매 자락 안으로 짤그랑 소릴 내는 뭔가를 주섬주섬 집어넣으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는 방문 앞 한편으로 물러선 아버지와 날 한번 힐끗 쳐다보고 버릇같은 헛기침을 또 하며 마당으로 나갔다. 멍석 위에 퍼대 앉아 있던 두 포졸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형방을 따라 나가는데, 그 뒤를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졸졸 따라갔다. 대문 앞에 다다르자 형방이 뒤돌아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두 사람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대청마루로 돌아와 아무 데나 털썩 주저 앉은 큰아버지가 곰방대를 찾아 불을 붙였다. 그는 뻐끔, 뻐끔 두 어번 담배를 빨고 나서야 아버지를 불러 곁에 앉혔다. 자초지종을 말할 생각을 했는지 큰아버지가 입을 열려고 하자 성질 급한 아버지가 먼저 선수를 쳤다.
- 아니, 형님! 그런 일이 있음 진즉에 말씀하시지, 이 아우 속을 애타게 하셨소잉. 지금 집에 두 분 말고 암두 없다는 거 아녀여?
- 허, 기어이 엿들었나 보네잉. 오늘따라 니가 유난스레 별나구나. 여하튼 뭔 일인지 대충 알게 되었다니... 안 그래도 내 속이 어지럽고 번잡한께 너까지 골치 아프게 헤집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잉. 너으 식구들 먹을 떡이나 좀 챙겨서, 이잉?
- 그라요, 서방님. 오늘은 날이 날이니께 형님 속 뒤집지 말고 돌아가시오. 용순이, 너 용순이라고 혔지? 떡 좀 챙겨줄 테니 너거 아부지 모시고 얼른 가.
나는 큰어머니가 떡을 챙겨준단 말에 혹 해서 기쁜 마음으로 무척 들떴다. 큰아버지 댁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어떻든,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있겠는가. 내 코가 석자, 아니 우리 식구들 코가 석자인데. 그저 떡이나 챙겨 아버지와 돌아갈 생각만으로 기쁘고 기쁠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나와 생각이 달랐나 보다. 잔잔한 물에 돌멩이를 휙 던지듯이 우리 아버지, 흥부가 큰아버지, 놀부에게 툭 던지는 말이 또 한번 공기 흐름을 바꿔 놓았다.
- 형님, 저 한티 말입니다. 서로에게 득이 될만한, 꽤 괜찮은 제안이 있는데. 저와 거래를 해보실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