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좌절, 콤플렉스에 관하여
나는 2006년에 개봉된 영화 야연을 자주 여러 번 봤다. 유독 가을이 다가올 즈음이면 생각나는 작품 중 하나다. 화려한 영상과 더불어 나름 서사가 있고 절제된 대사, 연기 또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주연 장쯔이, 남자 배우 오언조, 갈우 등 조연 배우들의 섬세한 내면 연기가 뛰어나다. 느리고 여백이 많은 대사와 영상, 몇 편의 연극무대를 영화 속에 배치한 듯한 구성이 독특하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중국 편으로 각색한 것 같다. 줄거리 또한 햄릿과 거의 유사하다. 사랑과 욕망, 음모와 배신으로 엇갈린 황궁 가족들의 비극을 그린다.
그리고 웅장하고 화려한 세트와 우아하고 절제미가 흐르는 무협 장면으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 좋다. 비슷한 영화 중 대중의 호평을 받은 '영웅', '와호장룡', '연인' 등의 작품을 통해 접했던 스케일, 영상미와 크게 다름이 없다. 또한 삽입된 ost, 구슬프고 서정적인 '월인가'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슬픔과 외로움, 어긋난 사랑을 나타내는 정서적 분위기를 끌어 간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어느 노인의 대사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인 것 같다.
나는 영화 리뷰를 쓰기로 하면서 단순히 이야기 줄거리나 감상평을 쓰기보다 이왕이면 극 중 인물들 간 미묘하게 흐르는 심리에 대한 내 짧은 소견을 적어보기로 한다. 물론 난 심리학을 전공한 적도 없고, 관련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도 않으므로 전문적인 지식과 해석이 부족하고, 다소 억측과 주관적일 수 있음을 앞서 밝힌다.
※ 영화 내용 일부 스포일러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는 '열등감, 욕구불만, 강박관념' 등으로 통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무엇을, 어떤 사람을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처했거나 어떤 이유로 그 욕망을 억눌러야만 하는 내면적 갈등이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애써 이겨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되는 슬픔이다. 콤플렉스(complex)는 사람의 마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말과 행동에 방향성과 지시성을 지니도록 종용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때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하면서 죄를 짓게 한다.
밤의 연회 클라이맥스 씬, 연회 자리에서 깜짝 공연을 선보이는 '청녀'. 비극적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만의 사랑을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하고 완성시키려 한다. 그녀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보다 사랑에 빠진 자신에게 향해 있는 외롭고 허망한 사랑이다. 비록 당신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지만 내 사랑은 '월인가'에 나오는 처녀 뱃사공처럼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으로 당신의 외로움을 달래주겠다 한다.
정작 자신의 헛된 열망과 외로움은 철저히 외면했던, 그녀의 일방통행적인 사랑은 어느샌가 그녀의 오빠, '은준'에게 옮아가 그의 절규 소리가 쩌렁하게 연회장을 울린다. 구체적 언급이 없지만 은준은 아버지 '은 태상'의 친자가 아니라 양아들이지 않았을까. 청녀는 태자를 사랑하고, 그런 청녀를 은준이 남몰래 마음에 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권력 앞에서 납작 엎드린 자세와 태도로 세명의 황제를 모시고 관직과 가문을 지켜낸 '은 태상'. 그는 관료,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자신을 비꼬고 욕보이는 새 황제 '리'(태자의 숙부)에게조차 비굴한 자세로 몸을 낮추면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이는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새 황제의 기분이나 심기를 건들릴까 눈치 보는 건 똑같다. 당장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압도적 힘과 권력을 지닌 존재 앞에서 자존심이나 대의 보다 말과 행동을 극도로 조심하며 실리를 챙기려는 은 태상.
황후가 청녀를 볼모로 잡으며, 그녀 스스로 여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밝히며 은 태상을 포섭하려 든다. 하지만 은 태상은 겉으론 황후의 편을 드는 척하다가 내심 자신의 아들, 은준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흑심을 품는다. 이는 그가 필요에 따라 강약약강 태도를 취하며 철저하게 권력에 빌붙으며 탐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딸도 태자에게 시집보내서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 극 중 가장 악인으로 등장하는 새 황제 '리'는 어떠한가. 선왕이었던 형님의 침실에 몰래 잠입하여 자는 형을 독살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게도 모자라 형수를 태후가 아니라 자신의 아내, 황후로 취하는 뻔뻔하고 악랄한 인물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5대 10국 시대'라고 설명하는 자막이 나온다. 대혼란의 시대로 변방의 거란족이 출현해 호시탐탐 국경을 위협하고 있고, 권력 쟁탈에 혈안이 된 반란세력들이 자주 출몰하며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운 시대였다 볼 수 있겠다. 황족끼리도 수시로 황권을 찬탈하려 했을 테니 형님 선왕을 독살한 새 황제는 그저 운 좋게 기회를 잡은 것일 수도 있다. 그가 형수를 취하고 싶었던 검은 욕망을 이미 오래전부터 남몰래 품어왔음을 알 수 있다. 손수 옥돌로 황후의 등허리와 몸 구석구석을 정성 들여 안마해 주면서 '선왕은 어땠어? 이런 거 너한테 해준 적 없지? 이런 나 꽤 괜찮지 않아?'라고 물으며 완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이 악랄하고 영악한 황제는 알고 보니 사랑하는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난, 순정파 남자였다.
장쯔이가 분한 황후라는 인물은 '경국지색'의 미모와 매력으로 황족 남자들을 몽땅 홀린 팜므파탈이다. 그녀에게 이런 미모와 매력은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동시에 업보(業報)이기도 하다. 새 황제는 순전히 황위 자체를 차지하려 했다기보다 '그녀를 오로지 자신의 여자로 소유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훔쳤다고 하는 게 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야연 자리에서 결국 그는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닫고, 다 부질없다 생각한 듯 단념한 표정으로 기꺼이 그녀가 건넸던 독배를 받아 마시고 죽는다.
이때 황후는 그토록 속마음으로 미워하고 혐오했으나 진정 자신을 미친 듯이 사랑해 준 남자, 리 황제의 마음을 뒤늦게 통감하고 눈물을 흘린다. 과연 악어의 눈물일까, 애도의 눈물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적의 죽음에 깊이 안도하는 눈물일 수도 있겠다 싶은,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장면이다.
영화 야연에서 황후 '완'(좌) 새 황제 '리' (우)
드디어 장쯔이, 황후 '완'을 말할 차례가 왔다. 리뷰를 쓰는 내내 언급하기 가장 복잡하고 힘든 인물이다. 황궁으로 시집오기 전까지 '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젊고 아름다운 소녀는 아주 예전부터 '태자'를 만나 이 둘은 서로를 향해 연심을 품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녀에게 '태자'는 의붓아들이기 이전에, 황후가 되기 전부터 첫사랑이며 연심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안타깝고 애달픈 사랑이다. 감히 선황에게 맞설 수 없어 황궁으로 시집오긴 했지만 의붓아들이 된 태자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다. 내심 태자가 강한 남자로서 자신을 잡아주기를 기대했으나 태자는 생각처럼 강인하지 않았고, 마음이 나약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당장의 분노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황후를 외면하고 도망친 태자를 보며 원망하게 된다. 하지만 태자를 걱정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크다.
새 황제, 리가 가진 힘과 권력이야말로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기에 당장 치미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애써 누르고 시동생의 아내가 되기를 자처한다. 새 황제의 연심을 이용해 사랑하는 태자의 목숨을 살리고자 한 거래이기도 했다.
연회를 여는 밤에 황제를 독살하고 자신이 여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은 태상을 끌어들여 암살 계획을 세운다. 하나 그녀가 황제가 되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은 태상'과 '은준'이다. 항상 뒤통수를 칠 기회만 노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었다.
영화 야연에서 태자 '우' (좌)
태자 '우'는 사랑하는 여자 '완'보다 어쩌면 아버지를 더 사랑했을 수도 있다. 친어머니를 어려서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정사를 돌보느라 바쁜 탓에 태자는 허전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자신이 지은 노래 '월인가'는 그냥 들었을 때 사랑 노래이지만 잘 들어보면 외로움에 대한 노래라고 설명한다. 왕자를 사모하는 처녀 뱃사공이 아마 자신을 비춘 거라 생각한다.
늘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으로도 힘든데, 하필 아버지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완'을 아내로 맞게 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가끔 우림위 무사들과 비등하게 무공을 겨룰 정도로 검술이 뛰어나지만, 그에 반해 섬세하고 착한 심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칼을 겨누고 자신의 목을 칠지 모르는 아들을 두려워하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목을 치고 아버지의 힘을 취하면서 넘어서려 한다.
태자는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끓어오르는 욕망 때문에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웠을 수 있다.
아버지를 해치고자 하는 내면의 괴물과 싸우고 싶지 않아 도망치듯 떠났던 게 아닐까. 차라리 눈에서라도 멀어져서 마음속 번뇌와 괴로움에 벗어나고자 기예를 익힌다는 핑계를 대고 먼 지방으로 떠난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 보낸 암살단의 습격을 받고 부하들이 희생한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뒤늦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과 함께 숙부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황궁으로 돌아간다.
전갈에 물려 죽었다고 전해 들은 선황의 죽음이 석연치 않고, 본능적으로 새 황제로 등극한 숙부 '리'가 자신마저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선황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운 '우'는 '완'이 아버지와 자신을 배신하고 숙부와 새로 혼인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배신감과 분노, 무력감으로 차라리 스스로 죽어 버리고 싶다. 드디어 태자는 '죽더라도 숙부를 죽이고 죽겠다' 결심하고, 은밀히 황궁으로 돌아와 몰래 칼 한 자루를 소매 안에 감추고 연회 공연 무리에 낀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은 '사람의 마음'이다. 좀 더 자세히 '사람의 욕망'을 말하는 거다. 욕망을 잘 표출하여 긍정적인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발산하면 좋으련만, 콤플렉스는 어쩌면 억눌린 욕망을 어두운 내면에 감추고 있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영화 야연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인물은 없다. 애초에 비극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완'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 당혹스러워 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과연 누굴 본 걸까. 그녀는 깊은 외로움과 회한을 느끼고 구슬픈 노래를 하며 허무하게 쓰러진다.
- 내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세월이 다 부질없었노라,
그토록 사랑을 위해서 노력했건만 사랑하는 이가 죽고 나니
세상 값진 금은보화와 부귀영화, 권력이 소용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