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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네 개를 한 번에 뽑았다.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by 김로기

결혼 후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늘 같은 계단 위에 서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 그 이상으로는 진전이 없었다.

나는 연애 다음은 결혼, 결혼 다음은 부모라는

어쩌면 지극히 보수적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또 다른 가족이 늘지 않았다는 것은

나에게 다음 단계가 오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다.

의도하지 않은 딩크로 살아가는 삶 또한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각자의 생활이 존중되어지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하지만 한 가지.

보이지 않는

평소에는 잘 느껴지지도 않던

그러나 어딘가에 계속 남아있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날들도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딩크로 살아오면서

속을 알리 없는 누군가는 우려의 말을 보태기도 했고

누군가는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얄궂은 동정의 마음을 들키기도 했다.

어쩌면 나 스스로가 느끼던 자격지심이

순수한 안타까움을 그런 얄궂은 마음으로 변질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절반은 단념했었고

그래도 우리라면

어느 날 갑자기 자연스럽게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했던

절반의 날들이 지나고

문득 다른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자란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갑자기 커져있던 마음이

나를 급하게 만들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바로 '사랑니 뽑기'였다.

결심이 선 바로 다음날 나는 치과를 찾았다.

그리고 조금 무모할지도 모르지만

사랑니 4개를 단숨에 뽑아버렸다.

지금의 나의 의지만큼이나 고통스러운 며칠이 지속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갑자기 다른 마음이 들게 된 것에 대해

진실로 간절한 마음인 건지

아니면 훗날 후회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불과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다음 계단 앞에 한 발을 올리고 섰다는 것이다.

나머지 발이 마저 올라갈지

아니면 올려두었던 발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걱정하는 후회는 없을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도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고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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