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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여름 Jul 08. 2024

<단편소설> 아이 上

한 품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둔덕의 묘지와 나란히 누운 낮. 지현은 제 마음도 모르고 파랗게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흘러가지도 않는데. 다듬어도 매번 끝도 없이 자라나는 풀들처럼 우거지게 자라난 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지연이 죽음을 맞던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지현의 기억에 생생했다.     


어제의 꿈은 무언가 달랐다. 어른이 되었음을 축하받았던 성년의 날 밤, 으레 그랬듯 꿈에 지연이 찾아왔다. 꿈속의 지연은 늘 아버지에게 맞아 눈물이 그렁하면서도 혼이 날까 차마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찡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유독 숨쉬기가 힘들다던 그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멎어가는 숨을 기어코 붙잡았던 그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 문틈 사이로 두려움에 떨며 그런 동생을 애써 외면하는 비겁했던 자신도 그날의 기억과 같았다. 다만 달랐던 점이 있다면, 이제 꿈속의 지현은 그때보다 두 뼘은 더 큰 어른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 미쳐있던 아버지에게 맞서면,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어른이 된 지현은 꿈에서조차 용기가 없었고 역시나 이번에도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 지현은 손목을 긋던 수많은 시간에도 살아남고야 만 자신이, 종국에는 이 모든 상처를 잊고 아등바등 살아가려 했던 자신이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지연이 나를 벌하는 것이다. 널 지키지 못해서, 꿈에서도. 모든 걸 애써 잊으려는 채 꾸역꾸역 산 스스로가 죄스러워 지현은 무덤가에 누워 꽉 막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무 미안해, 지연아. 행복해지려 해서 미안해.     


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린 건 동생의 묘지에서 돌아와 다시금 덮친 죄의식에 죽지 못해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불현듯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던 충동이 들었을 때 지현은 가까스로 친구가 보내주었던 대학 내 상담센터의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을... 예약하고 싶은데요. 떨리는 목소리로 예약을 마치고 가지 않는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냈다. 직접 상담센터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도 지현의 마음은 지옥과 일상을 오갔다. 어쩔 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다가도, 어쩔 땐 이대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앳된 얼굴들 사이 한참을 기다리다 안내를 받고 들어선 작은 대기실. 지현은 상담을 받는 기간 동안은 죽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상담사와의 첫 약속이었다.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지키고 싶어질까.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 쓰면서도 지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분한 베이지 톤의 상담실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생기를 더하는 넓은 잎의 몬스테라 화분과 크고 안락한 가죽 소파가 편안함을 주는 곳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상담사 아영이 활짝 웃으며 지현을 맞았다.     


“반가워요, 지현씨.”     


적당히 길게 웨이브 진 머리, 약간은 개구진 듯한 인디언 보조개와 잘 어울리는 산뜻한 목소리였다. 지현도 목례와 함께 가벼운 인사를 전하며 소파에 앉았다. 아직 경계심을 풀지 못한 지현을 이해한다는 듯 아영은 따뜻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한 뒤 몇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주로 지현이 작성했던 사전 질문지의 내용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청했던 상담이었고 분명 뭐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지현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목 뿌리 끝에 걸려 쉽게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야 하는데. 지현은 무의식적으로 아영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묵묵한 인내심을 비치고 있었다.     


“말하기 힘드시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보통 지현이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어른들이 하던 말은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어서”, “빨리”와 같은 보채는 말들. 혹은 “해”, “하지마”, “말 들어” 같은 강압의 말들. 어느 어른들도 지현의 선택을 당연하다는 듯 존중하지 않았다. 지현은 처음으로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럴 수 있다. 지현은 첫날 침묵을 선택했고, 어떤 우려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아영과 지현은 다음의 상담을 기약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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