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빛, 할머니의 마중

달빛 속을 걷다

by 루미상지


진안고원의 밤하늘에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다.

오늘은 가장 밝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다.

우리는 달빛 속을 걷는다.


지난 8월 말 태국에서 귀국한 뒤 처음 걷는 고원길이었다. 그동안 같이 걸었던 정겨운 시골길과 친구들이 빨리 보고 싶었다. 이 년 전 달빛 걷기 때 몹시 추웠던 게 생각났다. 두꺼운 패딩과 무릎담요,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아 등산 가방에 넣었다.

운산 인공 습지에서 저녁 식사가 끝나자 해는 서쪽 하늘로 완전히 사라졌다. 동쪽 하늘에서는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원길 주최 측에서 나눠준 한지등을 들고 강을 따라 4km를 걷기 시작했다. 깜깜한 밤, 환한 보름달 아래 강길, 들길을 걷고, 연꽃 방죽을 지나 용담 생태공원을 향해 걸었다. 경쾌한 발걸음, 살랑거리는 마음에 밤바람은 은은한 풀꽃향기를 실어 왔다. 숲 속 풀벌레는 귀국과 고원길 합류를 환영한다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9월 보름날 밤에 뜨는 보름달은 블러드문이라 했다. 개기월식으로 보름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붉게 보인단다. 잘하면 블러드문 옆에서 빛나는 토성도 볼 수 있단다. 다음 달 추석에 뜨는 보름달은 더 크고, 더 밝게 보이는 슈퍼문이 될 거라 했다. 9월의 보름달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하베스트 문’, ‘옥수수 달’이라 불렀다. 그들의 주식인 옥수수를 수확하는 풍성한 달이기 때문이다. 9월 진안고원의 보름달은 우리를 마중나온 ‘마중달’이었다. 보름달은 우리를 환영해 주러 마중 나왔고, 우리는 고원길에 처음 온 손님들을 환영하며 마중해 주었다.


옛날부터 우리는 보름달이 밝고, 환하고, 풍요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보름달이 뜨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소원을 빌었다. 한지등을 들고 달빛 속을 걸으니 외할머니와 남포등이 생각났다.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막내 외삼촌은 첩첩산중 시골에서 읍내까지 걸어서 중학교를 다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떼어놓고 마중 나가려 했지만 나는 끝까지 따라갔다. 저녁밥을 먹고 날이 어두워지고 일곱 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기차가 지나갔응께 일곱싱갑다. 나가야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섰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켜놓았던 남포등을 들고 우리 뒤에서 불을 밝혀주셨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를 지나고 신작로를 한동안 걷다 들판으로 나갔다. 밤하늘에는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남포등은 우리 앞의 길을 비춰주었다.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여서 오히려 재미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리밭 가운데 어디쯤에서 할아버지가 깜깜한 들판을 향해 외쳤다.

“워어이”

나랑 할머니도 같이 외쳤다.

“워어이, 워어이”

잠시 뒤 어둠 속 저 멀리서 똑같은 메아리가 들려왔다.

“워어이”

삼촌이었다. 막내 삼촌과 우리는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어느새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할머니는 까까머리 중학생 막내 삼촌을 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 인자 왔능가! 고생했네. 배 고프제? 언능 가자.”

삼촌은 읍내 중학교를 졸업하고 큰 도시인 광주로 고등학교를 갔고 대학은 서울로 갔다.


남포등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자라면서 보름달이 뜬 밤이면 종종 그때 그 기억이 떠올랐다. 보름달 속에는 남포등을 든 할머니 할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아이고, 내 새끼, 내 강아지들 아프지 말고 잘 커라 잉. 하는 일 모두 잘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우리를 잘 지켜주고 계실 것만 같아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해졌다.


보름달을 보면 습관처럼 항상 소원을 빌었다. 처음엔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빌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요즘은 달라졌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길”

9월 보름날 밤 진안고원 달빛 걷기에 온 사람들은 모두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용담 생태공원에 도착했다. 하늘엔 보름달이, 숲 속 곳곳엔 한지등이 걸려있어 분위기가 아주 낭만적이었다. 임시 무대 위에는 커다란 콘트라베이스와 건반. 드럼, 일렉트릭 기타, 그리고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여자 가수가 미리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숲 속 재즈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재즈 음악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몸이 흔들흔들 리듬을 탔다.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나를 보며 웃었다. 뭐 어쩌랴.....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데. 우리는 모두 재즈 음악에 취했다. 노래가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9월 가장 밝은 보름달이 뜬 밤, 진안고원의 보름달은 우리를 마중 나왔고 우리는 달빛 속을 걸었다.






#진안고원길 #달빛걷기 #보름달 #재즈페스티벌 #할머니할아버지 #마중 #달 #용담생태공원 #운산습지공원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고원길에 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