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정자 기행
깊어가는 가을, 쉬엄쉬엄 들길과 마을 길을 걷고 징검다리를 건너 정자에 오른다.
바람은 불어 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 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오늘은 고원길 걷기에 신정일 선생님이 이끄는 ‘우리땅 걷기’ 회원 80명이 합류했다. 모두 160명이 진안 섬진강 상류에 있는 다섯 개의 정자를 유유자적 걸었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진안 백운면에는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있고, 옛 선비들이 즐겨 올랐던 정자들이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미재천 계곡에 있는 영모정에 도착했다. 돌 너와 지붕과 우물천장이 아름다운 영모정과 그 앞에 있는 미룡정은 효자 신의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효행의 정자라고 한다.
단청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운정에 이르렀을 때, 신 선생님이 말했다.
“옛날엔 남자들만 정자에 올라 음주가무를 즐겼어요. 여자는 못 올라왔어요. 오로지 기생만 올라올 수 있었지요. 오늘 여기서 한 곡 부르실 남자분 안 계세요?”
신 선생님의 마이크를 넘겨받은 남자가 모운정에 올라 ‘그리운 마음’을 불렀다. 옛 정자 모운정에서 국악 대신 묵직한 바리톤 선율의 가곡이 진안의 산과 들에 울려 퍼졌다. 시적인 노래 가사가 무척 낭만적으로 마음에 들어왔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치며 한 곡으로 아쉽다 앙코르를 외쳤다. 그가 다시 ‘명태’를 불렀다. 늦가을 너른 들판의 누렇게 익어가던 벼들과 흐르는 계곡의 물들도 오늘은 한가하게 흘러가며 노래를 즐겼다.
맑고 깨끗한 섬진강 주변에는 아름다운 정자들이 많이 있다. 진안고원에는 금강과 섬진강이 시작되는 발원지가 있고 운장산, 구봉산, 내동산, 덕태산 등 아름다운 산들이 있다. 쌍계정과 쌍벽루를 지나 점심 식사할 내동산 솔숲으로 갔다. 들판 한가운데 아름드리 소나무 숲 솔밭 거리에는 우리보다 먼저 맛있는 밥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솔숲에서 뷔페식으로 먹는 밥은 정말 맛있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점심을 먹고 들길을 걸어 만취정을 지났다. 자연의 바위틈을 이용해 굴 안에 지어진 수선루에 도착했다. 수선루는 1984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수선루는 연안 송 씨 4형제가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이 바둑도 두고 시도 읊으며 신선같이 늙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 한다.
들길에서 찻길로 올라오자 자동차들이 씽씽 달린다. 시골길이니 조금 천천히 가도 좋으련만 빨리 가야 할 급한 일이 있나 보다.
정자에서 하루를 즐겁게 쉬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겁다. 정자의 대부분이 부모님에게 효행을 행한 정자였다. 효행의 정자는 못 짓지만 홀로 계신 엄마에게 잘해드리고 싶다.
매주 수요일은 엄마가 입원해 계신 재활병원에 가는 날이다. 아버지는 17년 전 돌아가셨다.
엄마는 87년 인생에 쉼이 필요한 분이었다. 6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 자상하지 않은 아버지와 살면서 혼자 고생이 많으셨다.
독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엄마는 수술하기 전까지 혼자 사셨다. 절대 바쁜 자식들에게 손 빌리지 않겠다며 몸 관리를 철저히 하셨다. 날마다 복지관에 다니시며 수학, 영어, 탁구, 글쓰기, 노래교실 수업을 들으셨다. 엄마의 시간표는 날마다 빽빽하게 짜인 고3 수험생 같았다. 엄마를 만나러 갈 때면 미리 약속을 해야 했다. 심지어 약속을 하고 갔는데도 갑자기 보강수업이 잡혔다며 나를 혼자 남겨두고 수업하러 가실 때도 있었다. 복지관 대표로 도전 골든벨에 나갔다가 골든벨을 울리지 못했을 때는 며칠 동안을 아쉬워하셨다. 일주일에 두 번 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을 하고, 주일은 성당에 나가셨다. TV 사극을 보다가 갑자기 내용을 미리 알고 싶다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달라 하셨다. 한 달에 한 번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 구경을 가서 먹고 싶은 것 먹고, 노래방에 가 노래 부르고, 쇼핑을 하고 오셨다. 마치 중학생 딸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엄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하셨다.
점점 연세가 들어가면서 몸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부터 좋지 않았던 고관절 시술을 받았고, 손가락이 휘었다. 한쪽 눈을 실명하고 다른 쪽 눈도 좋지 않아 안과를 다녀야 했고, 심장에 스턴트를 몇 개 심었다. 심장, 고혈압, 안과, 관절 약을 드셨다. 지하철과 버스, 택시를 타고, 신경외과, 소화기내과, 안과, 치과 등 병원 순례를 혼자 다니셨다. 무사히 집에 돌아오면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발로 걸어서 혼자 다녀왔습니다.”
자식들이 안부 전화를 드릴 때면 늘 잘 지낸다, 걱정하지 마라, 행복하다 하셨다.
4개월 전 갑자기 주저앉아 일어설 수 없게 되어 허리 수술을 받으셨다. 의사는 연골이 다 닳아 하나도 없다 했다. 그 뒤로 걷지 못하고 지금 재활병원에서 치료 중이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고 엄마는 의욕을 잃고 낙담하셨다. 4개월째 입원 중이지만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 깊으신가 보다. 병원에서 날마다 고기반찬이 나와 잘 먹고 있다면서도 진안의 싱싱한 채소가 먹고 싶다 하셨다. 밭에서 얼갈이배추와 무잎을 뽑아 가면 쌈 싸 드시며 좋아하셨고, 호박잎과 우렁이 강된장을 만들어 가면 맛있다 하셨다. 아이들과 함께 가면 더 좋아하셨다.
이번 주에는 책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가지고 가 읽어드려야겠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오신 엄마랑 푹 쉬었다 오고 싶다.
♧ 진안 고원길 걷기에 관심있는 분들 진안고원길 사무국장 입니다
010 9084 7069
#진안 #엄마 #정자기행 #가곡 #우리땅걷기 #그리운마음 #영모정 #미룡정 #모운정 #수선루 #쌍계루 #쉼
#쌍벽루 #가곡 #재활병원 #복지관 #수업 #감사기도 #책 #사노요코 #사는게뭐라고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