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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땐 울어도 돼

D의 웃음 뒤 숨겨진 이야기

by 강혜진

체육 시간.

오늘도 여전히 전전두엽 활성화를 위해 아이들을 바닥에 앉히고 명상을 준비한다.

줄넘기 100개, 준비 체조 1세트, 팔 벌려 뛰기 20개(정신 못 차리고 마지막 구령을 꼬박꼬박 외쳐대는 녀석이 있을 땐 50개 이상)를 하고 나면 다음은 명상이다.

"아빠 다리!"

매트에 열을 지어 앉은 아이들에게 아빠다리라고 외치면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은 당기고 어깨의 긴장을 푼 상태로 눈을 감고 코끝의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짧으면 1분, 보통은 2~3분. 올해 3월부터 이 루틴을 지켜왔다. 이제 자동으로 척척척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빠 다리!"를 지시하는데

한쪽 구석에서 두 아이가 구시렁거린다.

"뭐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그만 떠들고 집중하라는 경고의 말이다. 그런데도 말소리가 계속 들린다. 기분 좋은 속삭임이 아니라 누군가를 탓하고 비난하는 짜증 섞인 목소리다.

"전전두엽에 힘 빠진 녀석 누구야?"

명상을 준비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한쪽을 쳐다본다. 투덜대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Y가 입이 툭 튀어나와서 이야기한다. 억울한 게 있을 땐 늘 "아니~"하는 말을 붙이며 이야기하는 Y는 오늘따라 특히 억울한 마음이 큰지 "아니~"를 평소보다 유난히 길게 빼며 말한다.

"아니~~~, 얘가 아빠다리 하라니까 자기는 아빠가 없다잖아요. 놀래서 진짜? 물어보니까 아빠 병원에 있다면서 약 올리잖아요."

D에게 손가락질까지 야무지게 해 가며 말하는 Y. 걱정했는데 놀림당했다는 생각이 드니 입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튀어나와 보인다.


"억울하겠네. 그래도 친구 아빠가 없는 줄 알았는데 병원에 계신 걸 알았으면 다행이다 해야지. 알았으니 조용!"

Y를 조용히 시켜놓고 아빠가 병원에 계신다는 D를 보며

"아빠가 어디 편찮으신가 보다. 걱정 많이 되겠네."

하니

"우리 아빠 뇌졸중인데요."

하며 덤덤하게 말하는 D.

그 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D에게 놀랄 틈도 없이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폭로의 말.

"쟤네 아빠, 여섯 살 때부터 병원에 있었대요."

그리고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D에게 쏠리는 나머지 아이들의 시선.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

일단 이럴 땐 '공감력+앵무새 화법'을 적용한 "~구나." "~겠다."가 효과적이다.

"너희들도 몰랐구나. D 많이 힘들었겠다."

대충 분위기를 정리하고 얼른 명상을 하려고 다시 눈을 감는데 D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젠장, 명상은커녕 오늘 체육 시간은 계획대로 흘러가기 틀렸구나!


포동포동한 뽀얀 얼굴. 감은 건지, 뜬 건지 모를 순한 눈매. 늘 꽉 끼는, 조금은 작은듯한 레깅스(5학년 남학생이 레깅스라니... D는 분명 엄마말 잘 듣는 효자일 거야.)를 즐겨 입는 D는 다른 5학년 남학생들에 비해 많이 어려 보이고 한없이 착해 보이고 어딘가 좀 보호해주고 싶은 아이다.

공에 얼굴을 맞아 벌겋게 부어올랐는데도 웃으면서 괜찮다고 이야기하던 아이. 친구들이 필통 속 연필을 멋대로 집어가도 돌려달라 말 못 하고 웃고만 있던 아이. 왜 수행 평가지에 이름도 안 쓰고 있냐고 물으면 그제야 친구들이 연필을 다 빌려갔다고 웃으면서 눈만 끔뻑거리는 아이. 친구들이 모두 좋아하고 심지어 여학생들조차 귀여워하는 스마일 보이 D.


그런 D도 나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발야구 시간이었다. 덩치 크고 운동 잘하는 아이들에게 밀려 3루를 지키던 D가 달려오던 상대 팀 선수와 부딪혀 안경이 날아가고 얼굴에 멍이 들었던 적이 있다. 충돌 직후 너무 놀라 D를 바라보던 아이들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괜찮다며 계속 웃는 표정을 짓던 D. 나는 그날 아픈데도 웃고 있는 D의 얼굴이 어딘지 슬퍼 보였다. 감정이 이상한 건지, 표정이 고장 난 건지, 도통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D의 기괴하리만큼 밝은 표정과 괜찮다는 말이 슬프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발야구를 시켜놓고 D를 불러내 이야기했다.


"D, 많이 아플 텐데 괜찮아?"

아팠던 모양인지 D의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흐르는데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는 D. 이 아이는 거짓말의 달인이다. 뻔히 들킬 거짓말의 초고수!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며 나에게까지 괜찮다고 말하는 D에게 나는 그날도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아플 때, 화날 때, 그럴 때는 웃는 표정은 안 어울려. 울어도 돼. 발야구 못하겠으면 이야기해."

그날 D는 내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쉬라고 말하니까 그제야 스탠드에 앉아서 혼자 눈물을 훔치며 잠시 쉬다 보건실로 갔다.


늘 괜찮다고 말하는 D의 웃는 얼굴 뒤에 무언가 사연이 있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듣게 될 줄이야.

D는 참 힘들었겠다는 말에 그동안 숨겨놓았던 슬픔이 봇물 터지듯 터져버렸다.

그리고 40분 내내 목이 쉴 때까지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너무 울어서 아이가 정신을 잃을까 봐 나는 수업을 하면서도 D 곁을 지키고 시원한 물을 먹이고 세수도 시켜가며 D를 진정시켰다. D는 수업이 다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가 고난 후에도 쉬는 시간 끝날 때까지 한참 더 울었다.


여섯 살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어느 요양병원에 계시는지도 잘 모른다는 D. 슬퍼할 엄마를 걱정해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단다.

지난 추석에도 아빠를 뵙고 왔다는 말을 하다 다시 울음이 터져버린 D. D의 이상하리만큼 계속해서 웃는 표정 뒤에 숨겨진 슬픔이 이렇게나 큰 것이었는지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슬픔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눈물에 슬픔을 섞어서 몸 밖으로 쏟아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러니까 울고 싶으면 체육 선생님 찾아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줄게."


웃기만 하던 D가 우는 법도 잘 익혀가기를. 먹먹하고 답답한 감정을 눈물에 섞어 밖으로 배출하는 홀가분함을 자주 경험해 보기를. 그리고 오랫동안 병상에 계신 D의 아버지가 어느 날 기적적으로 나아서 D와 웃으며 지내는 날이 오기를.


나는 혼자서 아빠다리하고 코끝 호흡에 집중하면서도 계속해서 D가 떠올라서 눈물 대신 글로 나의 감정을 배출하려고 이른 아침 브런치 스토리 기록 중.


세상의 모든 이가 안심하고 잘 울게 되기를. 그러고 나서 다시 잘 웃으며 살아가기를. 인류애 넘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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