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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번진 필름처럼, 봄의 기억

안동에서 경주까지, 낯선 사람들과의 느린 여행

by 요요

우연히 한국관광공사에서 모집하는 "한국관광 사진 기자단 3기"에 선발됐다. "FrameKorea"라고도 부르는데, 약간 명예직 같은 거다. 오랜 취미생활 덕분에 내 사진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스스로도 뿌듯하다.


어떻게 선발 되었냐고?

네이버에 "소니 미러리스 클럽"이라는 카페가 있다. 평소엔 거의 안 들어가던 곳인데, 우연히 들어갔다가 대문짝만 한 공지사항을 봤다. 뭐에 홀린 듯이 지원했고, 덜컥 선발됐다. 정말 인연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hasselblad x2d 100c

평소에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한다. 2년 전쯤부터 인물사진에 관심을 두고 사진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동안은 hasselblad x2d 100c라는 카메라를 썼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Sony A1 Mark2 신제품 소식을 듣게 됐다. 마음이 움직였고, 기기 변경을 결심했다.


갖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랑 렌즈를 중고로 내놓았다. 거의 다 판매가 되어갈 무렵, 새 카메라를 사려고 했는데… 재고가 없었다.


하...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 "재고는 있는지" 같은 것도 확인 안 하고 그냥 장비부터 팔아버린 거다.


망했다.

대안으로, 출시된 지 2년쯤 된 Sony A7R5를 중고로 샀다. 좋아하는 화각의 렌즈도 함께. 그렇게 소니 카메라 유저가 됐고, 소니 카메라 정보를 좀 알아보려고 네이버 카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망한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관광 사진 기자단 3기"에 선발됐으니 전화위복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선발이 됐다. 이후 발대식은 경주에서 열렸다. 서울에 살고 있는 나는 바로 경주로 가지 않고, 부모님이 계신 안동에 들러서 1박을 하기로 했다.


부모님 집 TV는 스마트TV이긴 한데, 나온 지 오래돼서 넷플릭스 같은 OTT 앱이 지원이 안 됐다. 그래서 구글 크롬캐스트 4세대를 중고로 하나 사서 안동으로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TV에 크롬캐스트를 설치하고, 넷플릭스 로그인까지 완료. 아주 잘 된다. 부모님께 작동법을 알려드리고, 날 위해 준비해 주신 김밥과 토종닭 백숙을 저녁으로 먹었다. 백숙에는 온갖 한약재가 들어있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원래 밥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 엄마가 해주신 밥은 뭐랄까, 그리움과 맛이 합쳐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밥을 다 먹고, 소파에 앉아 요즘 화제작 "폭삭 속았수다" 1화를 같이 봤다. 사실 나는 이미 다 본 상태였다. 내용을 다 알고 다시 보니, 더 슬펐다.

부모님 앞이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아버지 눈이 붉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보니 나도 울컥했다.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해 보이셨다.

'이제는 공중파 일일드라마보다는, 넷플릭스 같은 걸 많이 보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경주로 갈 준비를 했다. 아침 식사는 어제 남은 김밥과 닭백숙. 나는 평소에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다. 볶은 검정콩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는 게 전부인데, 이날만큼은 배부르게 먹었다. 엄마 밥은, 역시 맛있었다.

그렇게 배를 두드리며 집을 나섰다. 경주로 가는 길, 마음이 약간 설렜다.


경주에 도착해서 근처에 사는 지인을 만났다. 근처라고 하긴 좀 뭐 하지만…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니까 그냥 근처라고 해두자.

지인에게 그 날 빌려준 카메라, Minolta hi matic 7s ii

그날 지인에게 내가 쓰던 필름카메라, Minolta hi-matic 7s II를 빌려줬다. 행사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겹벚꽃이 만개한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오랜만에 필름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원래 필름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오래된 취미고, 앞으로도 계속할 거다. 그런데 이날 만난 지인은 필름카메라는 처음이란다. 내가 사용하는 필름카메라 하나를 빌려줬다. 작동법은 아주 간단하게만 알려주고, 그냥 맡겨두었다. 너무 이것저것 다 알려주면 질릴 수도 있거든. 오히려 적당히 두고 보게 하는 게 더 흥미를 끄는 법이지.


나는 오랜만에 내 중형 필름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겹벚꽃을 담기엔 이만한 카메라도 없지. 예쁘더라. 너무 예뻐서 그랬나,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어서 그랬나… 괜히 기분이 들뜨고 좋았다. 처음 보는 하얀색 겹벚꽃이 활짝 피어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날 내가 사용한 카메라는 중형 필름카메라였다. 가로 세로 6cm짜리 정사각형 프레임. 일반 35mm 필름보다 훨씬 크다. 해상력이나 질감이 다르다.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결과물이 궁금해지는, 그런 카메라다.

내가 아끼는 중형 필름 카메라, Hasselblad 500cm


필름은 여러 가지를 챙겨갔다. Kodak E100, Portra 400, 그리고 Ektar 100. 그중에서도 Kodak E100은 유통기한이 2013년까지인 슬라이드 필름이라 좀 걱정이 됐다. 벌써 12년이나 지난 필름이라니.


슬라이드 필름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결과물이 많이 어두워지기도 하고, 점처럼 곰보 자국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위험을 알면서도 그 필름을 넣었다. 이유는 딱 하나. 궁금해서. 망쳐도 괜찮다. 그 시간을 그렇게 담고 싶었으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 슬라이드 필름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어떤 색으로, 어떤 질감으로 담겨 있을지.




오전엔 지인과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점심 무렵, 전국에서 모인 한국관광사진기자단 3기 작가님들과 만나서 켄싱턴 리조트로 함께 이동했다. 이런저런 정보를 듣고, 서로 자기소개도 하고, 점심도 함께 먹었다. 약간 낯설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사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까.

그리고 첫째 날의 촬영 장소인 "대릉원"으로 이동했다. 근데... 진짜 덥더라. 4월인데도 불구하고 최고 기온이 28도, 아니 29도까지 올라갔다. 땀범벅이 될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번갈아 들고 대릉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왕릉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늘 그렇듯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새롭게. 늘 그렇게 찍고 싶다.


근데 너무 더워서 그런지, 아니면 이 장소가 낯설어서 그런지 많이 못 찍었다. 뭔가 마음이 붕 뜬 느낌이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찍기에는 아쉬웠고, 깊게 들여다보자니 시간도 부족했고.

나중에 필름을 현상해서 보니 필름백 쪽으로 빛이 새어 들어가 있었나 보다. 대부분의 결과물에 빛 번짐이 심하게 생겼다. 사진들이 다 뿌옇게 나왔다.

처음엔 좀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또 괜찮더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사진처럼, 마치 수십 년 전에 찍은 느낌이 나기도 했고. 그 자체로 또 재미있었다.

"이 또한 즐겁지 않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첫날의 촬영을 마무리했다.

경주 대릉원, Hasselblad 500cm + 80mm f2.8 + Kodak Ektar 100
경주 양동마을, Hasselblad 500cm + 80mm f2.8 + Kodak Portra 400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디지털답게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촬영 매수가 많진 않았다. 아무래도 초봄이라 그런지 꽃들은 이미 지고, 아직 꽃도 잎도 나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 이제 막 연두색 잎이 올라온 나무들뿐이라 쉽게 셔터를 누르게 되는 그림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첫째 날 촬영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이 되었다. 둘째 날엔 경주 양동마을에 방문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하회마을처럼 초가집과 기와집이 어우러진 전통 마을이었는데, 하회마을보다는 집 수는 적은 듯했다. 대신 언덕 중간중간 집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이 참 예뻤다.


양동마을에서도 대릉원 때처럼 사진을 찍었는데, 날씨가 또 말도 안 되게 더웠다. 온도는 어제보다 낮았는데,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날이라 햇볕이 너무 따가웠다. 너무 더워서 몇 장 찍지도 못하고 금방 지쳐버렸다.

길을 걷다 보니 '수퍼'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초가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식혜(감주)랑 약과를 파는 것 같아서 슬쩍 들여다봤는데,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안으로 들어가 식혜를 주문하자, 할머니가 적적하셨는지 내 옆으로 오셔서 앉으셨다.

간단히 내 소개를 드렸고, 혹시 사투리 때문에 어색하실까 봐 "안동 사람이에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자기도 안동 권 씨라 하셨다. "어, 우리 할머니도 안동 권 씨인데요." 그렇게 작은 인연이 생겼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작가님 한 분이 집 앞으로 지나가시길래 안으로 불러들였다. 식혜 한 잔 대접하고, 또 다른 작가님들이 지나가길래 부르다 보니… 어느새 다섯, 여섯 명 정도가 모여 앉아 쉬게 되었다. 인싸도 아니고, E도 아닌데 스몰토크 하나는 제법 잘하는 것 같다.


그렇게 양동마을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둘째 날의 촬영도 끝이 났다. 발대식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많이 찍지 못한 사진, 더웠던 날씨, 빛 번진 필름들... 그래도 모든 순간이 다 기억에 남는다. 사진은 그런 거니까. 완벽하진 않아도, 그때의 나와 풍경, 시간을 담은 기록.

이 또한, 즐겁지 않나. 헤헷..


경주 양동마을, Sony A7R5 + FE 85mm F1.4 GM II (SEL85F14GM2)
경주 대릉원, Sony A7R5 + FE 85mm F1.4 GM II (SEL85F14G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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