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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리뷰

이해할 수 없음에도 곁에 머무르는 사랑에 대하여

by 나무들

이 글에는 《은중과 상연》의 주요 결말 및 핵심 전개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아직 보지 않았다면 주의하세요.


어떤 관계는 언어로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우정이라 하기엔 너무 깊고, 애정이라 하기엔 너무 복잡하며, 가족이라 하기엔 낯설다. 이름을 붙이려 하면 언제나 어딘가 어긋나거나 과장된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이 그려낸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


이 작품은 단순한 감정 교류나 우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려, 그 밑바닥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곁에 머무는 마음,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를 파괴하면서도 끝내 다시 돌아오는 힘 —

이 관계를 끝까지 이어주는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본질이다.


둘은 서로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깊이를 알아보는 존재이기에 떠날 수 없다.

그렇게 《은중과 상연》은 인간 감정의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층위를 탐구한다.


1. “너는 참 좋겠다”

— 서로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


“너는 참 좋겠다.”


은중이 처음 상연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질투도 경쟁심도 아닌, 멀리서 바라보는 동경이었다.


“완전함.

상연이는 거기 있음으로써 완전해 보였다.

도저히 닿을 수도, 이길 수도 없는 존재처럼 말이다.”


상연은 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당당하고, 공부도 잘하고, 춤과 달리기까지 잘하는 완벽한 존재. 예쁜 데다 흠잡을 데 없는 집안까지 갖춘 그녀는 은중에게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동경은 한쪽만의 것이 아니었다. 상연 역시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을 은중이 이미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두가 은중이를 좋아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은중은 타고난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었다. 상연은 그런 은중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열등감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기쁘게 할 수 없었던 엄마, 웃게 할 수 없었던 오빠의 마음에 은중은 너무도 쉽게 닿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은 보지 못한 채 상대의 빛나는 면만 바라봤고, 그래서 서로의 삶을 완전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 착각은 곧 오해를 낳고, 오해는 기대와 충돌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밀어낸 것도, 다시 끌어당긴 것도 결국 결핍이었다. 상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이 둘을 갈라놓았다면, 끝내 닿고자 하는 마음이 다시 서로를 이끌었다.


2. “너를 파괴하고 싶어서, 나를 파괴하고 싶어서”

—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파괴하는 마음


상연의 사랑은 늘 조심스럽다.

그 근원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빠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 죄책감, 그리고 오빠가 떠난 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엄마를 다시 살게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이 두 경험은 상연 안에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기혐오를 깊이 새겨놓았다.


그 믿음은 사랑하는 이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결국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번져나갔다. 그렇게 굳어진 내면의 구조는 오랜 시간 그녀의 관계 방식을 지배했다.


상연에게 외로움과 자기혐오는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익숙했다. 그녀는 그 익숙함 속에서만 안전하다고 느꼈다. 반면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랑 앞에서 늘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상연에게 사랑은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편이 안전했다.



이는 은중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연은 은중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감추고, 불안과 혼란을 들키지 않으려 거리를 둔다.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무심하게 구는 것도 그녀 나름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히려 은중에게 상연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그렇게 둘의 마음은 점점 엇갈리기 시작하고, 오해는 조금씩 깊어져 간다.


“좋아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미웠다.”


상연이 남긴 이 문장은 그녀의 내면 구조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은중은 상연에게 유일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결핍과 수치심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었다.

너무 소중해서 곁에 두고 싶으면서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매 순간 자각하게 했다.


그래서 상연은 그 존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 고통스러운 거울을 깨뜨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낀다.


게다가 상연은 은중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지탱해준 엄마와 오빠는 은중의 삶에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상연은 은중의 마음이 그들의 흔적이 남긴 연민이나 책임감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다.


“내가 지금 엄마 찬스 쓰고 있는 거잖아. 너 마음 약해지라고.”


스스로를 조롱하듯 내뱉은 이 말속에는, 은중의 사랑이 진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배어 있다. 그 불안은 상연의 자기혐오를 더욱 깊게 만들었고, 그녀를 다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믿음으로 되돌려놓는다.


불안과 오해가 켜켜이 쌓이는 가운데, 은중이 진심으로 건넨 말과 행동은 의도와 달리 상연 안의 깊은 상처를 건드린다. 애써 눌러놓았던 결핍이 그 충돌 속에서 의식 위로 떠오르고, 닿지 못하는 마음의 거리는 점점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번져간다.


상연에게 미움은 단순한 혐오가 아니었다.

은중처럼은 될 수 없다는 절망, 그리고 자신의 진심이 끝내 은중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좌절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그 좌절은 곧 상연의 입에서, 마음과 어긋난 말로 흘러나온다.


“어차피 너는 이해 못 해.”

“너만큼 나 자신을 혐오스럽게 만든 사람은 없었어.”

“네가 한 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혼자인 게 뭔지.”

“네가 멀쩡한 게 싫어. 망가졌으면 좋겠어, 나처럼.”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상대 안에서 ‘나의 연장선’을 찾으려 하지만, 은중은 끝내 상연과 같아지지 않는다.


좁힐 수 없는 그 타자성이 상연 안에서 미움으로 변하고, 그 미움은 이내 그런 감정을 품은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가 서서히 마음을 잠식한다.


그 고통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상연은 은중이라는 거울이 비추는 자신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관계를 무너뜨리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회피가 아닌, 스스로에게 내리는 익숙한 형벌이었다.



“너를 파괴하고 싶어서,

나를 파괴하고 싶어서.”


이 말은 바로 그 교차점에서 터져 나온다.

그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신념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너’를 ‘나’처럼 망가뜨려서라도 이해받고 싶은 절박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 욕망이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상연은 사랑과 증오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자신을 더는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가장 소중한 사람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너’와의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또다시 스스로를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너’를 파괴한 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연은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칼을 든’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버림받은 존재가 아닌, 스스로 어둠을 택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하나도 아깝지가 않거든요.”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태워버린다.


이처럼 자신을 파괴하려는 충동과 맞닿아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다.


상연은 “묘하게 순수해서 평생 날 좋아할 것 같았다”는 이유로 결혼을 택한다.

상대가 “한 번도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고백한 뒤에도 관계를 놓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입증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상연을 구원하지 못한다.

차갑고 단단한 겉모습 아래 숨겨진 그녀의 온기를 끝내 알아본 사람은 은중뿐이다.


상연이 처음부터 갈망했던 것도 결국, 은중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자신이 외면해온 결핍과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상연은 용서를 구할 용기도,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용기도 내지 못한다. 그저 예고도 없이 은중의 집을 찾아와, “뻔뻔해지기로 작정한 콘셉트야”라고 능청을 떨 뿐이다.


가볍게 던지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나를 봐달라’는 절박함이 숨어 있다.



마침내, 상연은 오랜 시간 눌러온 진심을 꺼내놓는다.


“너처럼은 할 수가 없어서,

아낌없이 줄 줄도, 받을 줄도 몰라서.”


그것은 사랑 앞에서 서툴렀던 지난 시간, 마음을 온전히 내어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자신에 대한 고백이었다.


상연의 사랑은 파괴와 갈망 사이를 끝없이 진동한다.

그 흔들림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심에 가까워진다.


3. “나는 한 번이라도 상연이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어”

— 이해를 넘어 머무르는 마음


상연이 자기혐오 속에서 관계를 밀어내고 무너뜨릴 때, 은중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


“나는 너한테 조금도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아.”


은중은 불안과 의심이 스칠 때, 거리를 두지 않고 그 의심을 밀어내며 맞선다.


은중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연을 지키려 애쓴다.

상연에게 부담이 될 만한 책임은 늘 자신이 먼저 감당한다.


“너 좋으라고 여기서 자라는 거 아니야. 방해돼서 그래.”

“선생님 뵈러 가자. 너 때문이 아니야. 나 좋자고 가는 거야.”


상연의 마음에 어떤 무게도 얹지 않으려는, 은중의 조심스러운 다정함이었다.


그러나 그 다정함이 상연에게 항상 온기로 닿은 것은 아니었다.


상연에게 김상학은 어두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처음으로 끌어올려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은중을 잃지 않기 위해, 그에 대한 마음은 감춰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춰진 마음은 은중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은중은 상학과 상연 사이의 미묘한 공기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상연을 잃고 싶지 않기에 그 마음을 애써 눌러 삼킨다.


“이제 진짜로 믿을게.”


은중의 사랑은 믿기로 결심하는 일이었다.


그 결심은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을 드리우게 했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난 순간, 상연의 선택은 은중에게 자신을 배제하려는 의도로 비쳐진다.



그것은 상연에게도 또 다른 상처였다.

숨겨둔 마음은 배려가 아닌 거짓으로 돌아왔고,

지키려 했던 선택은 결국 둘 사이에 깊은 간극만을 남겼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어긋남은 상연에게 ‘아무리 애써도 나의 진심은 끝내 너에게 닿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로 다가왔고, 그때부터 은중의 존재는 자신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타자의 표상으로 자리 잡는다.


보이지 않는 균열 사이로, 은중의 다정함마저 상연에게는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은 그 온기를, 속마음을 감춘 채 건네는 의례적 배려로 오해하게 만든다.


“월세 내던 건 계속 낼 거야.”

“살지도 않는데, 네가 왜?”

“내가 먼저 같이 살자고 한 거잖아.”


은중의 이런 애정 어린 말과 행동은 상연 안의 결핍과 수치심을 건드려, 그녀의 내면을 다시 흔들어놓는다.

바로 그 지점부터, 상연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은중은 물러서지 않는다. 상연이 수없이 상처를 주며 멀어지려 해도, 끝내 그 손을 놓지 않는다.


상학과의 관계가 끝난 뒤에도 책임을 상연에게 돌리지 않고, 겉으로는 서로를 밀어내고 으르렁거리는 순간에도 상연이 아프면 약국을 찾아 헤맨다.


누군가 상연을 비난하면 먼저 나서서 막아서고,

상연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무너진 순간에도,

자신을 배신한 순간에도, 은중은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


“너 이거 사랑 아니야.

집착이고 병이야.”


“네가 얼마나 빛나는 아이였는지

조금이라도 알면

너… 너한테 이런 짓 못해.”


상연은 그런 은중의 사랑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 상연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은중에게 희망을 심어준 은사였고, 그녀의 오빠는 사진을 처음 가르쳐준 첫사랑이었다.


그렇기에 상연은 그 사랑이 연민이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두려웠지만, 그보다 깊은 마음이 이미 은중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은중을 붙잡고 있는 것은 과거의 마음의 빚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상연이었다.



그 진심은 상연의 어머니를 둘러싼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장례는 어떻게 했어?”

“안 했어. 그냥 뿌렸어, 바다에.

네 생각 안 했던 거 아니야. 근데 네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짜증 나더라.”

“그래서 가서 혼자 뿌렸어?”


은중이 알고 싶었던 건 장례 절차가 아니었다. 그녀가 묻고자 한 것은 왜 자신을 부르지 않았는지, 상연이 그 시간들을 왜 혼자 감당했는가였다. 그 사실은 은중에게 깊은 충격이자 서운함으로 다가왔다.


그 분노와 슬픔의 밑바닥에는, 홀로 견뎌야 했을 상연을 향한 애틋함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상연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늘 은중을 먼저 놓아버린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반복은 은중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은중의 사랑은 때때로 분노와 절망의 형태로 드러난다. 또다시 모든 걸 버리려는 상연 앞에서 은중은 눌러왔던 속마음을 쏟아낸다.


“네가 버렸잖아. 널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

10년 전에도 자존심이 목숨보다 중요해서.

널 외롭게 만든 건 너야.”


10년 만에 다시 나타난 상연이 조력사 동행 제안을 거절당한 뒤, 건물을 증여하겠다며 세무사를 통해 연락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은중은 그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상연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상연을 향해, 문 앞에서 눌러 삼키며 말한다.


“아픈 거 보여줄 생각도 없으면서 뭐 하러 사람을 건드리니. 우리 그냥 살던 대로 살자.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치료 잘 받아.”


집으로 돌아온 은중은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화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곱씹는다.


세무사의 무례함 때문인지,

끝내 약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려는 상연 때문인지,

아니면 상연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능, 그 무력감 때문인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타자 곁에 남는다는 것은, 끝없이 다치고 흔들리는 자신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은중은 그 고통을 감내하는 쪽을 택한다.


“나는 한 번이라도 상연이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어.”


이 말에는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은중은 떠나지 않는다.

상처와 오해가 반복되어도, 은중은 상연이 감춰둔 그 진심을 외면할 수 없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이는 기다리는 사람”이라 말했다.


은중은 기다린다.

상연이 언젠가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주기를, 내면의 상처와 고통을 함께 나눠주기를.


마침내, 은중의 오랜 기다림은 상연이 생의 끝에서 써 내려간 기록을 통해 응답을 받는다.


은중은 처음으로 상연의 내면 깊숙한 어둠을 온전히 마주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상연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미워해왔는지,

그럼에도 얼마나 간절히 자신에게 닿고 싶어 했는지를.


그래서 은중은 수없이 망설이고, 그 길이 옳은지 자신에게 되묻던 끝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하는 쪽을 택한다. 상연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 그녀는 조용히 독백한다.



“답이 없다는 걸 알아.

그래도 너의 시간을 같이 겪을게.“


은중은 상연의 어둠을 걷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그 어둠 속을 함께 걷겠다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바꿀 수 없어도 그 시간을 끝까지 함께 겪어내려는 이 결단이야말로 은중의 사랑이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머무름’이고, ‘소유’가 아니라 ‘동행’이다.


그렇게 은중은 끝내 타자성을 품지 못해 떠나는 상연 곁에서, 타자성에도 머무르는 사랑을 보여준다.


그 선택 속에서 그녀는 깨닫는다.

사랑이란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4. “나는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 무의식이 알아본 다정함


모두의 환호로 가득했던 여름,

벽에 기대어 홀로 생각에 잠긴 상연의 고요함이 은중의 시선을 천천히 멈춰 세운다.


은중이 다가와 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고 묻자,

상연은 처음에 가볍게 흘려보냈지만,

이내 숨겨뒀던 마음을 조심스레 내어놓는다.


“은중이, 너도 그럴 때 있어?

뭐가 뚝 끊어지는 것 같을 때.

음… 괴리된다고 해야 되나.

뭔가가 진짜 그런 것처럼 열심히 흉내 내다가

거기까지 못 따라가서 멈춰 서 버리는 느낌?

뚝 끊어진 것처럼.”


상연의 내면에서 이어지던 미세한 단절을 은중만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 틈 너머로, 상연의 또 다른 결이 드러난다.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상연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옷으로 닦아 건네던 순간,

은중은 깨닫는다.


“나는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그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존재의 깊은 자리에서 울리는 인식,

말로 닿기 전에 흘러나온 진실에 대한 응답이었다.


은중은 어린 시절, 반지하방이 창피해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은 상연이 비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날, 은중은 상연을 자신의 공간 안으로 들인다.


“우리 집에 온 거 네가 처음이다.”


상연은 은중의 부끄러움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 순간, 은중은 상연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용히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머리로는 쪽팔린 거 아닌 거 아는데 그래도 계속 쪽팔려. 웃기지?”


잠시의 망설임 끝에, 상연은 은중의 고백에 답하듯 속내를 털어놓는다.


“우리 엄마는 나 미워한다.”



상연은 늘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믿음 안에서 살아왔고, 은중은 그 믿음을 끝없이 흔드는 존재로 나타난다.


상연이 “나 여태까지도 너한테 받기만 했어”라고 말하자, 은중은 곧바로 반박한다.


“네가 뭘 받기만 해.

옛날에 우리 만화 빌리고 떡볶이 사 먹고, 오락실 가서 DDR 하고 —

그거 다 누가 냈어?

나는 오백 원 있으면 오백 원 내고, 천 원 있으면 천 원 내고, 그것도 없으면 하나도 안 냈어.

그 돈 다 네가 냈어.

왜 네가 나한테 해준 건 기억을 못 해.”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상연이 외면해 온 자기 안의 다정함과 온기를 다시 불러내는 말이었다. 그 다정함이야말로, 무의식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본질이었다.


상연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바로 그 무의식의 층위에서 서로를 가장 깊이 알아본다.


계산되지 않은 다정함, 말 이전의 손길.

은중은 바로 그 본질을 누구보다 먼저, 가장 정확히 알아본 사람이다.


그래서 은중 앞에서만큼은, 상연의 깊은 자기혐오가 서서히 옅어지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조금씩 싹튼다.


상연이 은중을 통해 바라보는 가능성은 우연한 흔들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은중이 자신이 쥐여 준 리코더를 손에 들고도 끝내 때리지 못했던 그 순간 —


“너 이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이건 나무보다 더 딱딱하단 말이야.”


그때 상연은 예감한다.

“영원히 이 아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타인의 아픔을 조용히 알아차리고, 차마 상처 내지 못하는 마음.

자신에게는 없는 그 선연한 다정함이 빛처럼 눈앞에 다가온 순간, 상연은 처음으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세계를 보았다.


은중을 다시 마주했을 때, 상연 안에서 그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피어난다.



이렇듯 이들의 관계는 이해나 선택을 넘어, 존재가 존재를 알아보는 차원에서 작동한다. 언어보다 먼저 도달하는 감각, 의식보다 앞서 반응하는 무의식의 인식이 두 사람을 서로에게 이끈다.


그래서 이 관계는 ‘설명되는 것’이라기보다 ‘감지되는 것’이며,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몸과 마음이 알아채는 ‘알아봄’에 가깝다.


《은중과 상연》이 그려내는 것은 서로를 향해 응답하는 심연의 만남, 말보다 먼저 움직여 가만히 닿는 다정함이다.


5. “나를 왜 받아준 거야?” / “모르겠어, 나도. 네가 이상한 사람인가 봐, 나한테.”

— 문을 두드리는 사람, 결국 열어주는 사람


이들의 관계에는 매번 반복되는 구도가 있다.


늘 문 앞에 서는 사람은 상연이고, 그 문을 끝내 열어주는 사람은 은중이다.


중학교 시절 장기자랑 대타로 나선 순간부터, 대학 시절 오해를 풀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것도, 영화사를 그만두려는 은중을 붙잡은 것도, 회식에 나오지 않은 은중이 걱정돼 죽을 사들고 문을 두드린 것도 모두 상연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10년의 침묵 끝에,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느닷없이 “제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나의 친구 류은중”이라 말하며 다가선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에도, 또다시 은중에게로 향한다.



처음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서 있지만, 그 뻔뻔함은 무례함이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다. 은중에게 저지른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무섭기에, 태연한 척이라도 해야 다시 문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상연은 그 문 앞에서 은중을 기다린다.


그녀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은중을 찾는다.

용서를 구하는 말은 삼킨 채, 받아달라는 마음 하나만 내민다.


하지만 은중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자 상연은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나는 그때 너희 집 되게 좋았는데.”

“좋기는 뭐가 좋냐.”

“내가 처음이라 그랬잖아.

나만 너희 집에 놀러 간 거잖아.”

“그래서 좋았다는 거야?”

“응.”


상연에게 은중은 처음으로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은중은 그런 상연을 외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상연을 가려주고, 결국 그녀를 또다시 집 안으로 들인다.


그날, 두 사람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서로의 진심을 마주한다. 눌러왔던 말들이 오가고, 숨기려 했던 마음들이 드러난다.


은중은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던 질문을 꺼낸다.


“너, 일 잘 되고 안 아플 때 내 생각했어?”


단순한 원망이 아니라, 상연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상연은 그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은중을 바라본다. 코와 입을 감싸 쥔 손끝에서 깊은 숨이 새어 나올 뿐이다.


침묵 끝에, 상연은 봉투 하나를 은중에게 건네며 입을 연다.


“이렇게 안 됐으면 못 왔을 거야. 잘못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잘못해서.

좋아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안 그래서.

미워해서 미안해.”


오랫동안 전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진심이었다.


죄책감에 용서를 구할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던 시간들, 은중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그 고백 안에 담겨 있었다.


얼마 후, 은중은 상연이 두고 간 봉투를 펼쳐 본다.

그 안에는 상연이 지난 시간을 고백하듯 적어 내려간 글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유서처럼, 혹은 고백문처럼 은중에게 바치는 생애의 기록이었다.


글을 읽으며 은중은 비로소 깨닫는다.

상연이 결코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떠나 있었던 시간에도, 외면하려 했던 순간에도,

상연의 삶을 깊숙이 관통하고 있던 이름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한때 상연이 홀로 섰던 바다 앞에, 두 사람은 함께 서게 된다.



“나를 왜 받아준 거야?”

“모르겠어, 나도.

네가 이상한 사람인가 봐, 나한테.”


은중은 여전히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해되지 않아도 밀어내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어도 결국 문을 연다.


그것은 연민도 용서도 아닌, 더 깊은 차원의 감각이다. 머리로는 해석되지 않아도, 존재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반응하는 어떤 것이 은중으로 하여금 다시 그 손길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상연에 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상연의 마음이 자신을 떠난 적이 없다는 걸 은중은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상처를 받아도 다시 문을 열고, 떠나보냈다가도 결국 받아주고 만다.


떠났다가도 다시 다가서는 사람과, 끝내 마음을 열어주는 사람.

그 끝없는 반복이 서로를 놓지 못한 채 다시 마주 서게 만드는 힘이다.


6. “네가 날 받아주는구나… 끝내, 네가”

— 고요한 구원으로 남은 사랑


이들의 사랑은 결국 ‘구원’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지점에 다다른다.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천천히 되짚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상연은 조용히 은중을 바라보다 입을 연다.


“왜 그랬을까… 나한테 친구는 너 하나뿐인데, 왜 잃어버렸을까. 너를.”

“결국 찾았잖아.”

“정말?”

“그럼.”

“너도 내가 보고 싶을까?”

“당연히… 보고 싶겠지.”


그제야 상연의 눈빛이 조심스럽게 풀린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끝내 확인하고 싶었던 것 —

자신이 정말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대답을, 은중은 망설임 없는 확신으로 건넨다.


상연은 벅찬 숨을 내쉬며 말한다.

“네가 날 받아주는구나… 끝내, 네가.”


그것은 평생 자신을 옭아매던 죄책감과 수치심, “사랑받을 자격 없음”이라는 내면의 문장을 마침내 덮어쓰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상연은 은중의 수용을 통해 생의 끝자락에서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


그렇게 비로소, 자신을 받아들인다.


상연의 죄책감은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었다. 오빠와 엄마의 상실이라는 불가해한 고통 앞에서,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책임감이라도 떠안아 삶을 버텨내려고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이었다.


그녀는 그 깊고 집요한 감정 속에서 평생 자신을 벌하며 살아왔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상연은 은중이 자신으로 인해 죄책감을 짊어지게 될까 염려했다.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거 느끼면 안 돼.

정말 안 돼.“


그건 스쳐 지나가는 당부가 아니었다.


상연은 팔을 다쳤을 때도, 놀란 은중을 보고는

“거봐. 아, 이렇게 놀랄 거면서, 참… 야박한 척하기는.”이라며 태연한 웃음 뒤로 통증을 숨겼고,

공항에서는 차마 은중의 번호를 누르지 못한 채, 화면을 그대로 닫았다.

“그 말이 내 30대 전부를 지배했어.”라고 고백한 뒤에도, 무거운 표정의 은중을 바라보다

“야, 뭘 그렇게 심란해해. 난 그냥 이실직고한 거야, 솔직하게.” 라며 애써 분위기를 돌렸다.


그 모든 노력은, 은중이 상처받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 상연의 마지막 다정함이었다.


그 다정함은 끝내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했다.


“우리 인사는 여기서 하자.

고마웠어, 너무.”


은중이 “같이 가자”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한 걸음이 은중의 삶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걸, 상연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중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같이 가달라고 해. 반대로 말하지 말고.

내가 같이 갔으면 좋겠지?”


그리고 상연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어놓는다.


“응.”


그 말은 동행, 그 이상의 의미였다.

은중이 처음으로 상연의 오래 숨겨온 마음을 말보다 앞서 읽어낸 순간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끝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인간이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숭고한 온기.


그 온기를 통해 상연은 마침내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그리고 은중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그 순간, 이들의 관계는 ‘구원’이라는 이름에 다가간다.



《은중과 상연》은 단순한 우정이나 애증의 서사가 아니다.


이 작품이 탐구하는 것은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그 밑바닥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만드는 관계다.


둘은 서로에게 구원이자 지옥이다. 상처를 주고 파괴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멀어지면서도 다시 돌아온다.


그 파괴적인 반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보고, 서로의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은중에게 상연은 ‘자신을 넘어서는 사랑’을 보여준 존재이며, 상연에게 은중은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증거다.


이렇듯 이 관계는 어떤 이름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우정이라 하기엔 너무 지독하고, 애정이라 하기엔 너무 뒤틀려 있으며,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 멀다.


다만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알아보고, 그 밑바닥에서 서로를 놓지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은중과 상연》은 남는다. 아주 고요한 구원의 이야기로 —

인간이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사랑의 가장 깊은 형태로.


결국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은 어디까지인가.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소유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무르고, 다가가고, 기다리는 선택을 반복한다.

그 선택은 때로 우리를 파괴하고 고립시키지만, 동시에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한다.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머무름 —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통해 배우는 사랑의 진실이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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