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빠르게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골목마다 초록빛이 짙어지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반짝였다.
복덕방은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한여름의 공기를 들이고 있었다.
안에서는 아직은 이른 하얀 모시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부채를 흔들며 앉아 계셨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늘 낮 최고기온 31도”라는 앵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길을 걷는 아이들은 일찍 찾아온 여름 모기에게 물려
종아리며 팔뚝마다 분홍색 물약 자국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누군가는 팔을 긁으며 웃었고, 누군가는 친구에게
“야, 너는 여긴 왜 세 군데나 물렸냐?” 하며 놀렸다. 그런 웃음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여름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주희는 가방을 메고 학교로 오르는 언덕길을 걸었다.
언덕 아래쪽엔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늘 같은 시간, 같은 속도로 올라오는 그 아이는 언제나 동화속 왕자님처럼 보였다.
주희는 순간 눈길을 주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덕을 오르자 운동장 앞 태극기가 보였다.
학교 앞엔 이미 일찍 온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교실엔 아직 종이 울리지 않았고,
운동장 위에는 여름 햇살이 하얗게 깔려 있었다.
“주희야!” 시영이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너 오늘 늦게 오는 줄 알았어.” “아니야, 언덕이 너무 더워서… 땀나 죽겠어.”
둘은 웃으며 운동장 옆으로 걸었다. 5학년, 6학년 언니들이 나무 그늘 밑에서 고무줄을 하며
“하나, 둘, 셋!” 하고 큰 소리로 외쳤고, 그 옆에서는 남자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술래잡기와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웃음소리가 여름 하늘로 흩어졌다.
그날 체육 시간은 운동장에서 열렸다. 담임 선생님은 모자 대신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자, 오늘은 달리기 시합이야! 끝나면 수돗가에서 물 마셔도 돼!” 하고 외쳤다.
아이들은 신나서 운동화를 차며 달렸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뒤섞였다.
수업이 끝나자 남자아이 몇 명이 수돗가로 몰려가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다.
“야! 하지 마!” “차가워!” “선생님 온다!” 순식간에 물보라가 터지고,
곧이어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 세 명!”
결국 남자아이 몇몇이 복도 마루바닥에 무릎꿇고 앉아 손들고 있었다.
주희와 시영이는 그 모습을 보며 킥킥 웃었다.
“저렇게 더운데도 장난칠 힘은 있나봐.” “그래도 저게 여름이지 뭐.”
하교길엔 바람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둘은 언덕을 내려오며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시영이가 먼저 말했다.
“내가 살게. 오늘 아침에 엄마가 200원 더 줬어.”
“진짜? 그럼 나는 다음에 사줄게.” 둘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시영이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주희야, 내일은 일찍 와! 고무줄 같이 하자!”
“알았어!” 주희는 웃으며 버스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시영이의 흰 블라우스가 점점 멀어졌다.
집에 도착하자, 마당에 주주가 있었다. 주희를 보자마자 주주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달려왔다.“주주야, 덥지? 오늘은 목욕하자." 주희는 수돗가로 가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터져 나왔다. 주주는 깜짝 놀라며 뛰어오르고,
그 물이 주희의 얼굴로 튀었다. “야! 너 물싸움 하자고 한 거 아니야!”
주희는 웃으며 손바닥으로 물을 튕겼다. 둘은 마당 한가운데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신나게 뛰어놀았다. 햇살이 그 위로 반짝이며 쏟아졌고,
둘의 웃음이 저녁 바람 속으로 퍼져갔다. 물이 마르고, 해가 서쪽 담벼락으로 기울 무렵,
주희는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털며 마루에 앉았다.
주주는 그 옆에 고개를 기대며 누웠다.
‘학교 가는 길도, 돌아오는 길도,
이젠 주주가 없는 건 상상할 수 없겠구나.’
주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 위로 떠오른 노을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