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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지 Jul 20. 2024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에게 반문하다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닫힌 방'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닫힌 방'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가 타인에게 지옥을 선사할 수 있는 고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시각은 현대의 개인주의가 늘어나면서 더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남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듯, 타인에게 온전한 이해를 바라는 것도 사치이며 서로의 괴리 안에서 우리는 더 불편해진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행동은 변화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보통 그걸 사회화되었다고 한다.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가족은 타인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는 걸 가정하고싶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행동을 제한받고 그로 인해 지옥을 겪게 된다는 걸 생각하면 가족은 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는 가족과 있을 때 어느정도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경향이 더 강하다. 또 심리적으로도 보통 가족은 나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애초에 타인이라는 말 자체도 가족과는 조금 어색해보인다. 완벽하게 타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타인의 범주 안에서는 조금 가장자리에 위치한다고 할 수는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몸이 많이 약한 아이였다. 말수가 적고 소심한 아이였고 착한 딸이기도 했지만 사춘기때는 부모님께 반항도 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여자 아이였다. 나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지만 정반대로 나의 쌍둥이 언니는 친구도 많고 주말에도 약속을 나가느라 통 집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엇나갔던 것은 아니다. 그냥 밝고 붙임성 좋은 성격 덕에 친구가 많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업을 마치면 친구랑 놀더라도 9시 이전에는 꼬박 집에 들어가고 주말에는 집에서 뒹굴거렸지만, 언니는 평일도 주말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렇지만 언니도 대학에 막 입학한 보통의 새내기였을 뿐, 20살이 넘어간 이후로는 꼭 그러지도 않았다. 


그렇게 7년이 지나고 27살이 된 나랑 언니는 아직도 부모님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나는 덕을 본 것도 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나는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않고 허튼 짓은 하지 않는 얌전한 딸이었기에, 또 상대적으로 말썽을 부리지 않는 자식이었기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들어와도 뭐라하시지 않았고 자취도 더 일찍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언니는 나와 상대적으로 외향적이고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으면 어디냐고 걱정하시며 전화를 거셨다. 그 당시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부모님의 언니에 대한 걱정은 몹시 정상이지만 아쉬운 건 지금까지도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나 조차도 일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시선에서 나는 아직도 몸이 약하고 예민한 딸이고 언니는 늦게 돌아다니고 걱정시키는 딸이다. 실제로 언니는 22살 이후부터는 학교 수업이나 가끔 약속이 있을 때가 아니면 헬스장 외에는 잘 나가지 않았고 취직을 한 지금도 퇴근하고는 바로 집에 오는가 하면 친구를 만나는 것도 연례행사가 되었을 정도다. 그렇지만 아직도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이 생각하던 어렸을 적 언니와 나를 투영해서 현재까지도 바라보고 계신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라며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 않고 말도 안되는 일이다. 이게 나쁘단 건 아니지만 나는 부모님의 획일화된 시선 속에서 변하지 않는 딸이고 어쨌든 그 판단을 견뎌야 한다.

그럼 나는 그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타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더 유연한 시각을 가진 것 같다.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지만 변화에는 관심이 많다. 그래서 나에 대한 이미지가 굳어져 있어도 작은 변화에 즉각 반응을 한다. 이토록 미세한 변화를 금세 알아차리고 나에 대한 시각이 변한다는 건 내게 큰 관심이 없으면서 타인의 변화에는 관심이 많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족보다 타인에게 쉽게 감동받고 실망하는 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다거나 예상보다 매정한 사람이었다는 등의 판단이 시시각각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판단적 시선으로 인해 타인과의 공존이 지옥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런 요인으로 인해 우리는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관심이 없기에 타인은 나를 전체적으로 평가하지, 세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또 그들은 나를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나를 완전히 다 파악하고 있다는 그릇된 자신감 또한 없다. 실제로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기 마련이며 상대의 변화가 있을 때 '내가 생각보다 이 사람을 잘 몰랐구나'하고 쉽게 꼬리를 내리게 된다. 대략적인 그들의 감상평은 오히려 타인이기에 취약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 지금 당장 보여지는 내 모습에만 판단을 내리며 더 깊게 알려고 하지도 않기에 나를 지금 보이는 모습 자체로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랑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질 뿐이지 본인이 가진 나에 대한 선입견에 끼워넣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다.


관계란 가까워졌다가도 멀어지고 죽고 못살 것 같다가도 그 감정이 어떤 형태였는지 아득해지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타인과 떨어져 살 수 없지만 꼭 특정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변화하는 내 모습에 따라 그들의 시각과 우리의 관계가 유연하게 수용된다면 타인의 관계성은 나를 보여주는 수단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과연 타인은 지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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