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장
지난 여름날, 맨발 걷기 산책길을 따라 누군가 봉숭아를 일렬로 심어 놓았었다.
나는 더위를 피해 낙우송 그늘 아래 맨발 걷기 길이 좋아서 자주 그곳을 찾았다. 바로 옆에는 냇물이 흘러서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배치해 놓은 물조리개로 물을 퍼다가 뿌려 놓았다. 햇살이 따가운 무더운 날씨에 운동화와 양말을 벗는 것만으로도 시원한데, 차가운 흙바닥을 밟으면 냉장고 속 냉기가 발바닥에 전해져 천국의 순간을 맛보곤 했다. 조용히 걸으며 새소리를 듣고, 냇가에 자생하는 식물이며 잘 가꾸어 놓은 화초들을 보는 재미도 이곳을 찾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봉숭아들과도 자연스레 마주하게 되었다. 키가 손바닥만 한 한줄기 작고 가냘픈 봉숭아도 분홍색, 하얀색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델처럼 키 큰 봉숭아는 나날이 가지를 뻗치고, 근육질 몸매처럼 줄기가 굵어지고, 짙은 초록잎이 무성해지도록 꽃을 피우지 않았다. 너무도 건강해 보이는 나무에 꽃이 안 피다니 뭐가 부족한 걸까 슬슬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며칠 바쁜 일로 뜸했다가 그곳을 찾을 때엔 그 아이의 소식이 먼저 궁금해졌다. 가서 보면 거인이라도 되려는 냥 점점 나무처럼 커져서 놀라웠다. 푸르고 싱싱한 건강미 사이에 화사한 꽃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으로 치면 잘 나가는 미스들이 자신만의 생활에 만족하며 결혼을 거부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봉숭아로 태어났으면 꽃도 피고 열매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들을 하며 늦여름이 되었다.
간만에 찾았을 때 이 아이가 드디어 붉은 꽃송이를 두세 개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반가움에 오래도록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후로도 계속 새로운 꽃을 피웠고 씨앗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래, 너는 대기만성형이었구나. 모든 자연은 자기 소임을 다 하지.'
나는 이 봉숭아로 인해 잊지 못할 여름 산책의 풍성한 기억을 갖게 되어 기뻤다. 자연 속 생명들은 언제나 내 곁에서 쉼과 배움을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원문장
산골에서 살면서 나는 다른 눈으로 꽃을 보게 됐다. 꽃을 장식이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생명으로서 바라보는 시각이랄까. 그랬더니 마치 꽃이 말이라도 건넬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자고 나면 쑥 자라 있는 대문 앞 꽃을 볼 때면 , 나 이만큼 자랐어요.'라고 자랑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 잎이랑 줄기가 겅중 자랐네, 오므렸던 몸을 활짝 폈구나!'라며 가까이 얼굴을 대고 싱그러운 아침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마치 아가들이 커가는 날들에 기뻐하며 서로 대화하듯 말이다.
안은미, 아빠의 빈구두를 신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