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리 Nov 24. 2024

가족의 역사 in 1992

24.11.24.

지난 토요일은 외할아버지 생신이었다. 재작년에 팔순 잔치를 했는데, 올해 뵌 모습도 여전히 정정하시다.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 손자가 선물한 주황색 중절모를 매일 쓰고 다니시는 정과 멋이 가득하신 분이다.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가까이 사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저녁 식사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날 외할아버지께서 해주신 지난날의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충무(현재 통영)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내가 태어났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연고 없는 타지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엄마는 출산 휴가만을 사용 후 복직했다. 세 들어 살던 집 안주인(우리는 모두 충무 엄마로 부른다) 낮으로 나를 보살고, 엄마와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나를 보살폈다. 이때 부모님 나이는 겨우 20대 중후반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도내에서도 0591, 0597과 같은 지역번호를 누른 후 전화번호를 눌렀다. 용건만 간단히 할 것 같은 다소 어색해 보이는 부녀 지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구체적으로 상상은 안 됐지만, 외할아버지는 엄마와의 통화에서 퇴근 후에 나를 보면 엄마의 스트레스가 모두 풀린다는 말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날은 사실 아빠 생일 파티 날이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와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외할아버지의 말씀은 이 자리에서 다시 화두에 올랐다. 짓궂은 동생이 엄마를 놀리면서, 'ㅇㅇ이 보면 스트레스가 진짜 다 풀렸어?'라고 물었다. 엄마에게 전해 들은 당시의 상황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당시에는 관리자가 아닌 교원들도 9월 1일 자 인사발령이 있었다. 아빠는 엄마보다 6개월 먼저 고향인 H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엄마는 당시 3살이었을 나와 떨어져 지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고, 무조건 나와 함께 있겠다는 생각으로 충무에 남게 되었다. 아빠의 부재와 엄마의 불안을 직감했는지, 나는 밤마다 빽빽 울면서 엄마를 힘들게 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빽빽 울었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인데도 들을 때마다 웃기(고 귀엽)다.) 다음날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엄마를 생각해 충무 엄마가 밤새 나를 달래주시고 엄마를 재웠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죄송한 마음이 컸던 엄마는 결국 아빠와 할머니 곁으로 가게 되었고, H군에서 충무까지 출퇴근하기로 결심했다.



할머니 댁은 H군에서도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M면이다. M면에서 충무시까지 이동 동선은 다음과 같다.  

①아빠가 자차로 M면에서 H읍 터미널로 데려다줌

②H읍 터미널에서 J시 터미널까지 시외버스 타고 이동

③J시 터미널에서 충무시 터미널까지 시외버스 타고 이동

④충무시 터미널에서 직장까지 택시 타고 이동



H읍에서 6시 첫 차를 타야만 8시 40분 이전에 직장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퇴근 후 다시 할머니 댁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3개월간 했다. 마지막 코스인 버스를 타고 어둑한 밤에 마을에 도착했을 때 "엄마아아앍!!!(ㅋㅋㅋ)" 하며 뛰어오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그 힘든 피로가 싹 풀렸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고 하니(ㅋㅋㅋ), 엄마의 피로가 싹 풀렸을 것이다. (ㅋㅋㅋ)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사랑받았다는 느낌은 가득하다. 우리 가족은 통영으로 여행을 자주 가는데, 갈 때마다 곳곳에 깃든 당시의 추억을 말씀해 주시곤 한다. 언뜻 보면 누가 더 많이, 누가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겨루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당시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또다시 행복을 느끼는 중이라는 생각이, 이제는 든다. 가족으로써 함께 할 때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하루다.

작가의 이전글 방학 6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