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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히 마주친 May 20. 2024

"나 예술가다"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디서든 흔하다

한 피아니스트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필자보다 열세 살 언니다. 사적으로는 모르는 사이인데, 무대와 객석 사이의 틈을 두고 다섯 번 이상 만났다. 마치 동물원 우리의 울타리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코끼리의 실제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돈이 백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유 시간이 하루에 열 시간 이상 남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생에게는 할인을 해주는 공연들이 있었다. 사회인이 되면 못 보러 다닐 것 같아 한 달에 한두 번은 보러 다녔다. 지금은 인터파크 티켓 계정이 휴면 상태이리라. 방학이었는데,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으로 감상하고 싶었다. 일단 TV에서 한 번 이상 얼굴을 본 사람들 것은 없었다. 포스터에 나온 사진 상으로 그녀를 처음 보았다. '수익금 얼마를 어느 단체에 기부하겠다'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 단체인지 쓰면 누군지 알아볼까 봐 못 쓰겠다) 이왕 볼 거면 이걸 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객석의 모든 불이 서서히 꺼졌다. 미약한 조명이 피아노를 비추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성인 남자 세 명이 들러붙어야 열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무거운 문이 열리자, 등장했다. 베이지색 드레스 위에는 빈틈없이 장미꽃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세 개 이상의 색실이 쓰였고, 민소매였다. 가슴골이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박수가 일순간 멎은 것은,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였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왼손을 머리 높이로 치켜들어 연주를 시작했다. 이미 심취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마지막엔 마이크를 들고 나와서 긴장하여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와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기부는 평생 할 거니 함께 하자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방학 때마다 보게 되었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여담인데, 드레스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항상 '오늘은 뭘 입고 나오려나' 기대되었다. 흰 바탕 위에 빨간 장미가 수놓아진 드레스, 몸 전체에 딱 붙었던 벨벳 재질의 머메이드 오프숄더 드레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은 인터미션 때 화장실을 가면 줄을 서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옆자리의 신사가 말을 걸어왔다. "잘 치시죠?" 느닷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피아니스트이니 당연한 것이니까. "네. 잘 치시죠."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았다.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세요?"라고 질문받았다. 필자는 피아노로 젓가락 행진곡밖에 칠 줄 모른다. 순간 팸플릿을 훔쳐보았다. "하이든이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대화가 이어지는 게 싫었다.

그 외에도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필자에게 '어느 집 따님'이냐고 묻던 정장 차림의 노신사, 피아니스트를 '선생님'이라 칭하면서 공연이 끝나고 뒷말을 하던 여학생들, 해설사가 등장하면 박수 전혀 안 쳐주다가 피아니스트가 등장하자 민망할 정도로 손뼉 쳐대던 여자 두 명.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필자를 제외한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 전원이 피아니스트의 가족, 친구, 교회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유독 '그 공연'에만 가면 말 시키는 사람이 많았던 게 그래서였구나! 마지막 인사 때 객석에 앉은 은사를 호명하던 것도, 공석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사를 이야기를 하던 것도, 해설을 맡아준 박사가 계속 동일인물이었던 것도.

칠 년 전을 마지막으로, 본 적이 없다. 중간에 코로나 사태가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왠지 그걸 알고 나니까 기부고 뭐고 가기가 싫어졌다. 앞으로도 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걸 알고도 예전의 그 선율이 똑같이 귓속에 와닿을까. 벽을 높여야 할지 낮춰야 할지는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다. 만리장성만큼 높으면 대중이 넘을 수 없고, 초등학교 담벼락만큼 낮으면 우습게 보일 테니 말이다. (오늘 글 마무리가 잘 안 된다. 쓰다 만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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