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때 담임이 현장체험학습을 가서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시켜서 하는 건 의미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덕분에 현충원에 널브러진 쓰레기가 줄어들었다. 담임은 자꾸 '지하철 타고 올 때 누구랑 같이 왔느냐'라고 물었다.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때라서 혼자였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면 새벽 네 시에 TV 화면을 틀면 고주파음과 함께 나오는 회색 화면처럼 불투명하다. 그 해가 끝날 때까지 이름 대신에 '전학생'으로 불렸고, 졸업사진을 찍는다는 날에는 핑계를 대고 결석했다. 다만, 애들 뒤를 따라가서 수성 사인펜으로 현충원 방명록에 기록했던 것만큼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죽음'이라는 가치는 누군가에게 '어두움', '귀신'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적어도 필자는 아니다. 불사신은 없으니까. 입구에는 국화를 파는 행상이 있었고,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유족일 듯했다. 순간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보여줬던 참전용사증이 스쳤다. 비록 열 살도 안 되었던 때였지만, 선명하다.
전직 대통령의 묘는 사십오 도 정도로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셔틀버스 제도가 있었지만, 한 대 놓쳐서 삼십 분은 기다렸어야 했다. 다리가 얼마나 튼튼한 지 테스트하고 싶어졌다. 올라가고 있는 개인 차량들이 보였다. 사이드미러로 필자의 모습이 보일 것이었다. 되도록 안 쳐다보려고 노력했다. 태워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들고 온 가방 손잡이가 가죽으로 되어 있었는데, 찝찝하게 땀이 스몄다.
묘 앞에 도착하니 이미 열 명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 거의 다 등산복 차림이었고, 머리칼이 희끗희끗했다. 삼십 대는 필자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눈에 띄었다.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다가와서 물었다. "젊은이가 여기 왔네? 여기 인사드리는 거 있는데, 해볼래?" 눈치로 보아하니 왠지 돈 내야 하는 것 같아서 안 하겠다고 했다.
화환과 향이 있었다. 봉분은 1m는 충분히 넘었고 2m는 안 되어 보였다. 잔디는 누르스름한 것과 파릇파릇한 것이 섞여 있었다. 그때의 대한민국은 황사가 온 하늘처럼 누렇게 보였을 것이었다. 현재의 푸른 하늘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집무실에서 홀로 앉아 있었을까. 전직 대통령과 영부인 얼굴이 아른거렸다. 내조가 없었더라면 아마 업적은 없었을 터. 남편의 가능성을 짐작했던 것이 놀랍다.
사람들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목례 후 내려왔다. 감시초소에서 누군가 창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서 살짝 돌아보았다. 방명록에는 이니셜로 기록했다. 한글이나 한자로 쓰기에는 창피했다. '존경합니다' 한마디를 남겼다. 비석들은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돌들처럼 정교하게 줄지어져 있었다. 습한 더위에 젖은 잔디 속에서 풀벌레들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