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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히 마주친 May 24. 2024

내 생애 마지막 고교 백일장

첫인상이 진할까 마지막이 진할까

이상하다. 글이 어디에 노출되었나 보다. 특정 '어떤 글'이 자꾸 조회 수가 올라가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쓴 경수필인데. 아무튼, 오늘 할 이야기는 이게 아니다.

전에 같은 소재로 쓴 글이 하나 있는데, 읽고 오면 이해가 쉽다. '고교 백일장'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잔디밭 위에 돗자리 하나 펴고, 김밥이나 과자를 한 개씩 주워 먹으며 배를 깔고 누워 여유롭게 시를 쓰는 모습? 선선한 바람을 타고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는 강원도의 풍경을 보고 묘사하는 모습? 전국대회나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것은 입시 스펙과 직결이 된다. 때문에 정해진 규정과 장소가 있다. 외부에서 쓰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곳도 많고, 옆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히 안 되고, 휴대폰도 걷어가서 대회 끝나고 돌려준다. 학원 선생님하고 연락을 주고받아 아이디어를 캐치해서 써내는 부정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고교 시절 마지막 백일장은 경희대 백일장이었다. 지금은 아마 없어진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 정보인지 모르겠다. 늦여름이었고, 시제는 '꽃비'였고, 심사위원은 소설가 노희준이었다. 백일장 열에 아홉 개는 당일 채점 해서 당일 시상한다. 시간은 보통 서너 시간 남짓 걸린다. 어차피 문장력에서 일 차 거르니까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의 글이 한 문단 읽히고 버려진다는 소리다.) 그러는 동안 점심밥을 주거나 강연을 들려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경희대의 경우는 강연을 해줬다.

뒤통수들만 보아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잘 안 듣고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눈치였다. 아마 지루해서 그랬겠지. 초빙된 강연자는 소설가였다. 갑자기 맨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질문을 했다.

"학생? 이름이 뭐지? 그래. 작가가 되면 뭐가 좋을 것 같아요?"

"학생 때는 시제에 맞춰 써야 하는데, 원하는 걸 쓸 수 있으니까 좋을 것 같아요."

그 짧은 대화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필자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점심으로는 학식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노란 소스를 끼얹은 돈가스를 먹고, 경희대 교정을 잠깐 구경하다가 시상식을 보러 갔다. 당연히 필자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고,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소설을 쓰려면 읽어야 합니다." 경희대 백일장은 특이한 점이, 시와 소설이 일등상 하나를 놓고 경쟁했다. 보통은 트랙이 다르다. 일등은 시를 쓴 학생 중에 나왔다. 예고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이크를 넘겨주고 수상 소감과 함께 낭독을 할 기회를 줬다. '첫 대상이라 의미가 남다르다'라고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입시'만 아니었으면 그날 먹은 음식이 소화도 잘 되고, 빈손으로 돌아가지만 웃으면서 갈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쉽다. 밤이 다 되어서 집에 도착했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이라 밤엔 선선했다. 나중에 친구가 말해줘서 알았다. 이제 곧 수시 원서 접수니까 스펙 쌓기는 끝나지 않았느냐고. 바보처럼 수능 직전까지 백일장 나갈 뻔했다. 마지막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고3은 고2에 비해 시간이 두 배로 빠르다. 그에 비해 경력이 없어서 수시와 정시를 둘 다 놓지 못해 양손을 번갈아 쳐다보게 된다. 수시 접수와 논술 시험 때문에 사실 고등학교 제도는 삼 년이 아니라 이년 반이다. 가장 더웠던 여름을 떠나보낸 기분이었다.

백일장에서 수상을 받는다고 해서 내일모레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못 받는다고 해서 글 쓰지 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아니다. 서른 넘은 아줌마 입장에서 말해주자면, 전국에서 상을 휩쓸었던 애들 중에 지금도 글 쓰는 애들 거의 없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기죽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짧은 글은 내 가능성을 다 보여주기에는 너무 짧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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