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히 마주친 Aug 04. 2024

스무 살이 경조사를 대하는 방식

경조사 가주고 손절당하는 방법

그해 겨울은 능욕적이었다. 학원비 전액을 선불로 받은 입시학원에서는 합격할 거라 했던 내 작품을 불합격 선이라 말을 바꾸었고, 썸인 줄 알았던 남자에게서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고, 당일 약속만 잡던 친구는 강남에 가기로 했던 날 잠수를 탔다. 

미성년자를 막 벗어난 신체는 탈피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려는 가재처럼 꿈틀거렸다. 어깨가 시리고 늘 배가 고팠다.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 시간,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스무 살은 원래 다 저런가' 생각했다. 술맛을 잘 몰랐기에, 늘 과일소주를 마셨다. 지금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12월의 어느 날, 친구로부터 그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 돌아가셨다. 열두 시간 뒤에 발인인데 지금 올래?"

스무 살이 들어주기에는 어려운 요구였다. 당시의 최저임금은 오천 원이 채 안 되었다. 이구동성으로 필자에게 말했다. "네가 그 자리에 가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귀에 안 들렸다. 장례식장 예절부터 검색했다. 절을 하는 방식과 순서, 조의금을 내는 방법을 외웠다. 하필 밖에 있었는데 흰 옷이었다. 사당역 지하상가에서 검은색 니트를 사 입었다. 일요일 밤인지라 영업 중인 옷가게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이었으면 등산복 차림이어도 그냥 갈 텐데, 경험이 없어서 그래야 하는 줄만 알았다. 내 몸통이 두 개는 들어갈 만큼 컸다. 길이도 맞지 않아 소매가 자꾸 무명지에 낀 실반지를 가렸다. 거울 속 모습은 아빠 옷을 몰래 훔쳐 입은 유치원생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외투조차 맞지 않았다. 왼 손에 걸쳐 들고 택시를 타고, 내리고, 걸었다. 니트에 난 작은 구멍들 사이로 바람이 송송 들어왔다. 나무조차도 짚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 행인들의 시선이 부딪히는 것만 같아 눈을 내리깔았다.

허겁지겁 뛰어들어가자, 친구가 입구에 서 있었다. 필자는 끌어안았다. 당장 내일부터 얘가 밥은 어떻게 차려 먹을 것인가, 십 년 뒤 혼수는 누구랑 보러 다닐 것인가, 김치를 담그는 방법은 누구한테 배울 것인가가 걱정되었다. 진심으로.

영정에는 사십 대 여인의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두 번 절하고 머리카락이 빗자루 끝자락 마냥 바닥을 쓸 정도로 반절했다. 육개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고스톱 치는 아저씨들은 없었다. 사오십 대 이상의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가는 길엔 빈털터리가 되었다. 방명록에는 한자로 기록했고, 조의금은 삼만 원 했다. (누군가는 적게 냈다고 욕할 금액이지만, 당시 물가로는 한 달 치 교통비였다.) 정확히 집에 갈 차비 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올 것처럼 하던 '또 다른' 친구는 몇 시간을 연락으로 찔러보더니 오지 않았다. 지하철 한 량에 타고 있는 머릿수를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인적 드문 밤이었다.

해가 바뀌자 무슨 맥락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는 필자에게 장애인과 소개팅하라는 말을 했다. 사진도 보여줬다. 대학에서 알고 지내는 오빠라고. 이 말만큼은 정말 안 꺼내려고 했는데, 필자는 당시에 지금보다 20kg 이상 더 나갔다. 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사 입을 줄 알았고, 블레이저를 가지고 있었으며, 육 개월에 한 번 이상 열펌 시술을 받았다. 외모가 인생의 전부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정작 자기는 비장애인이랑 사귀면서.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에게 말이 전달 될 가능성도 있겠다, 차별하는 쓰레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게 거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정을 정확히 느끼지 못했다. "내가 장애인이랑 사귀어 보니 장애가 전부가 아니더라, 너도 소개팅해봐라"라면서 말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다. 오히려 당사자에게도 실례다.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연애 혹은 결혼 시장에서 자신들이 비장애인보다 다음 선택지에 위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위선자다. 우태기(내가 만든 말, 우정의 권태기)도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끝났다. 연락이 끊어졌고, 동선이 겹치는 곳도 있었지만, 한 번을 마주치지 않았다.

결국 검은 니트는 일회용품처럼 버려졌다. 헌 옷수거함이 아닌 종량제봉투에. 미련이 전혀 남지 않았다. 입고 갈 장소가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 오지 않았던 '또 다른' 친구가 현명했다. 절대로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우리가 함께 술 마셨던 올림픽공원의 잔디밭, 눈이 마주치면 슬리퍼 신은 발로 뛰어내려오던 방이동의 얕은 비탈길, 햄버거세트를 먹을 때면 감자튀김 하나를 더 추가로 사 와서 내 쟁반에 부어주던 하얀 손이 떠오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다시 연락할 일은 없다. 얼마 전 시그니엘이 보이는 뷔페에서 식사하며, 여기가 송파구라는 것을 실감했다.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여전히 스무 살은 떠나가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이전 07화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진짜 문제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