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악마라톤-나의 26km

몸이 써 내려간 긴 문장

by 플레이런너


친구가 청광 종주(청계산, 우담산, 바라산, 백운산, 광교산) 26km를 뛰자고 했다.

평지 달리기밖에 모르던 내겐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아내도 “당신 몸으로 그걸 왜 하냐”라고 말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솔깃했다.

“솔직히 마라톤 풀코스도 벅찬 내가 왜 뛰려고 할까?”

15년을 달려온 내 다리가 새로운 지형을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또한 호기심 대장인 내가 산악 마라톤이란 낯선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산악마라톤과 평지에서 뛰는 일반 마라톤과 가장 큰 차이는 보급 방식이었다. 마라톤대회 풀코스를 뛸 때는 맨몸으로 뛰다가 주최 측에서 5km마다 주는 음료와 바나나, 초코파이를 먹고 뛴다. 잘 차려진 뷔페였다.

이에 비해 산악마라톤은 완전히 달랐다. 내가 마실 물도, 먹을 간식도 모두 내가 짊어지고 가야 했다. 배낭 속엔 물통, 에너지바, 구급용 밴드까지 들어 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게와 함께 흔들렸다.

다른 또 하나는 달리는 코스였다. 평지에서는 사람들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뛰면 된다. 앞사람만 보고 달리다 보면 골인 지점에 자동적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산악 마라톤의 참가자는 극히 적었다. 많아야 몇백 명 수준이다.


중반에 접어들자 코스는 더 고요해졌다.

뒤에서 뛰는 사람은 몇 안 되고, 앞사람은 이미 시야 밖이었다.

대회 안내 표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문득 발걸음이 멈칫했다.

“이게 맞는 길인가?”

가끔 보이는 주자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마라톤 대회와 달리, 이번 길은 따라갈 무리가 없었다.

오직 나만의 판단으로 산을 넘나들어야 했다.

능선은 끝없이 이어지고, 사람 그림자는 사라졌다.

내 발밑의 흙먼지와 거친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나무가 똑같이 생겼다.

갑자기 마음 한가운데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난 여기서 왜 뛰고 있는가?”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바람만 훅, 가슴을 스쳤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뛰고 오르막을 힘겹게 밀어 올리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달리고 싶어서’ 달리고 있었다.


15년 전, 어머니를 산책에 모시고 나간 김에 나도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그 작은 습관이 쌓여 어느새 나의 마라톤 인생에 출발이 되었다.

어느새 광교산 팔각정 정상에 도착했다. 비로소 완주할 수 있겠다는 힘이 생겼다.

여기부터 4km 남았다.

산이 숨 쉬고, 내가 그 숨을 이어 계속 달렸다.

달리기가 어느새 등산이 되었다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20km쯤 지나니 생각이 없어진다. 깊은 명상에 빠지듯 잡념도 사라진다. 꼭 산이 내게서 생각을 가져가고 바람만 페이스메이커로 남겨둔 듯하다. 오르내리는 나만 있었다.

이윽고 경기대 입구의 반딧불 화장실이 보였다.

26km. 4시간 25분.

이제야 알겠다.

아내가 걱정하던 몸으로, 친구가 부추기던 도전으로,

나는 결국 나를 넘어섰다.

산의 호흡을 빌려 달린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달리는 나’를 만났다.

26km,

그것은 그저 숫자 한 줄이 아니라 몸이 써 내려간 긴 문장이었다.


2015. 06.




#산악마라톤

#마라톤

#청광종주

#청계산

#광교산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4화아산병원 가는 길 – 팬티가 날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