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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드디어 장원을 하셨다.

by 느긋

가족 카톡방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엄마였다.


'아빠가하동가서장윈을했데요1등'


띄어쓰기가 전혀 되지 않고 맞춤법도 틀렸지만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가 한시대회에서 1등을 하신 거다. 가족들의 축하메시지가 쏟아졌고 카톡의 새로운 기능인 폭죽도 계속 터졌다.


49년생으로 올해 77세가 되신 아빠의 가장 큰 취미는 '한시'다. 최근에는 성독(소리 내어 한시 읽기)에도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고 계신다. 아빠가 한시에 입문하신 지 5년 째로 그동안 크고 작은 한시대회에 나가 차하(3등), 참방(4등), 가작(5등)은 많이 하셨지만 단 한명에게만 주어지는 장원(1등)이라니 정말 대단한 성과다. 한시를 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장원이라는 꿈을 가지고 계실 텐데 아빠는 그 꿈을 '꿈만 같이' 이루셨다.


퇴근 후 추어탕으로 유명한 맛집에 들려 2개를 포장하고 지난 주말 지역축제에서 맛있게 먹었던 동동주도 한병 챙겨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우리 집은 10층이고 부모님 댁은 같은 아파트의 같은 라인 19층이라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친정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엄마를 잘 아시는 13층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나에게 웃으며 물으신다.

"친정 가?"

"네."


부모님 댁에 들어서니 아빠는 씻고 계셨고 엄마도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고 계셨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아빠의 장원 상금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빠 상금이 100만 원이란다."

"오, 진짜?"

화장실 문 너머에 계신 아빠에게 다시 축하 인사를 드렸다. 추어탕과 동동주만 전해드리고 내려가려던 차에 아빠가 나를 불러 세우셨다.

"잠깐, 내 이야기 1분만 듣고 가라."


이 1분이 30분으로 되었지만 아빠의 이야기는 평소때와 달리 진심으로 재밌게 느껴졌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셨지만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아빠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무래도 한시대회에 같이 참여한 지인들과 하신 뒤풀이 저녁자리에서 반주를 한잔 하셨나 보다. 얼마나 기분 좋게 한 턱을 내셨을지 생각하니 용돈을 더 두둑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아침에 밖에서 소리가 이상한 소리가 깍깍 들리더라. 그 소리가 나중에 알고 보니 새소리였다. 너네 엄마는 그 새를 직접 보기까지 했단다."

"까마귀였어?"

"까마귀는 아닌 것 같고, 암튼 처음 듣는 새소리였는데 산까치인것 같더라."

아빠의 이야기를 재밌게 듣고 계시는 엄마도 이야기에 살을 붙이신다.

"처음에 위층에서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는데 커다란 새가 우리 집 창가에서 막 울고 있더라. 서너 번이나 꽤 오래 울고 가더라고."

이미 우리 부모님에게는 이 새가 장원을 가져다 준 신비로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 새가 길조였다고 그 뒤로도 한참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셨다.

"우연의 일치도 참 신기한게 鳴(울 명)자가 시험에 나왔단 말이다."

아침에 새도 울고, 시험문제도 새가 우는 '울 명'자가 나와서 나도 이 대목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우주의 기운이 아빠를 돕는 듯 하였다.


그동안 이 대회 준비를 위해 아빠가 하신 수많은 연습과 노력을 너무나도 잘 안다. 한 번씩 부모님 댁에 들르면 평소 지으신 한시를 내게 보여주시고 어떠냐고 자주 물어보셨다. 하지만 한시에 대해 무지했고 조금은 귀찮았던 나는 무조건 다 좋다는 피드백을 아빠에게 돌려줄 뿐이었다.


"연습했던 8글자가 하나도 안 나와서 그냥 편히 썼다. 그래도 수상자를 부를 때 가작에라도 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랑 같이 간 사람이 가작에 붙었고 혹시 참방(4위)에 내 이름이 있을까? 없어! 혹시 차하(3위)에 내 이름이 있을까? 없어! 혹시 차상(2위)에 내 이름이 있을까? 없네!"

점점 고조되는 아빠의 말에 나도 집중이 되었다.


"그때 옆에서 집에 가자고 하더라고. 그래도 장원 시 한번 보고 싶어서 장원 발표까지 기다렸다."

"그래가지고? 그때 집에 갔으면 큰일 났겠다!"

"장원은 이름이 먼저 안 불리고 장원 시가 적힌 종이를 걸어두는데 아빠는 멀리 15m 정도에 있어서 잘 안보이더라. 그런데 아빠 성이 멀리서 보이는 거야!"

한자로 된 성이 특이하여 눈에 잘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이때까지도 설마 하며 전혀 기대를 하지 않으셨단다.


"같은 집안사람이 포항에 사는데 그분도 한시는 정말 잘하시거든. 처음에는 그분이 된 줄 알았다."

"아,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아빠 지역이랑 이름이 딱 불리는 거 아니냐!"

이때 나는 폭풍 같은 박수를 쳤다. 옆에서 듣고 계시면 엄마도 막 웃으시면 "막내딸 호응이 너무 좋소!"라고 하신다. 아빠의 기분이 더 좋으시라고 과장되게 반응을 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 대목에서 정말 나도 신이 났다.


"어머! 그래가지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한동안 멍 하더라고. 주변에서 다 앞으로 나가라고 해서 정신없이 나갔다."

"우와, 아빠 진짜 웬일이야! 정말 떨렸겠다!"

"장원이니까 한마디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한마디 했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시는지 장원 소감발표를 그대로 진지하게 재현하셨다.

"감사합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5년 전 한시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소감 내용을 한번 더 말씀하셨다. 이를 이어 사회자가 성독을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 부분에서는 실제로 엄마와 내 앞에서 성독까지 보여주셨다. 뒤로 갈수록 아빠의 목소리는 우렁차지고 에너지가 넘쳐 성독에도 기승전결 이야기 같은 흐름이 있음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하동향교와 같은 명문 있는 대회에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모였고, 58회라는 전통도 있는 아주 권위 있는 대회여!" 아빠는 말씀을 멈추지 않았고 더 신이 나신 듯 보였다.

"와, 아빠 진짜 대단하십니다!"

"너네 아빠 진짜 대단해! 상금 아이들에게 좀 나눠줘요."

"안 그래도 아이들 기운 얻어가라고 한 집당 5만 원씩 나누어 줄라고 하네!"

"상금 100만 원 받아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겄소!"

"암만, 한 200만 원을 쓸라고 마음먹고 있네!"

"아빠, 이렇게 돈 쓰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네. 쓰고 싶어도 못쓰는 사람도 많아!"

"이미 오늘 저녁에 소고기로 한턱 쏴서 다섯이서 25만 원 나왔다."

"진짜 잘하셨어요! 아빠 진짜 얼마나 좋으실까? 자다가도, 똥 싸다가도 웃음이 실실 나오겠네."


아빠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나 좋아 쉴 새 없이 말씀하시는 아빠를 보니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보통 장원 시가 걸리면 '뭐, 이런 게 장원이여?'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오늘은 하나도 그런 말이 안 나왔다고 하더라!"

"와, 아빠 정말 대단하셔! 진짜 장원급제! 가문의 영광이네!"

"이거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여!"

같이 간 지인들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였을 아빠는 딸자식 앞에서 모든 자랑을 쏟아내셨다.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힘은 내면에서 나오지만 이렇게 보상이 따라온다면 그 힘은 더 강력해진다. 한평생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빠께서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한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시니 자식 된 입장에서 더없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평소 아빠가 하시는 이야기를 식탁에서 잘 들어주시는 엄마의 공도 참으로 크다. 아직도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계시는 엄마가 별다른 판단이나 평가를 하지 않고 아빠에게 보내주시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이 오늘날을 만들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조금도 과장됨이 없다. 나는 아빠가 가끔 하시는 성독을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실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같은 것을 여러 번 들어도 그때마다 아빠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아빠는 더 힘을 얻었으리라 본다. 어느덧 엄마도 뜻은 모르지만 아빠가 하시는 성독을 흉내 내기도 하신다.


"성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엄마도 정말 대단하네!"


두 부부가 서로를 의지하며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에서 또 한 번 감사함을 느낀다. 아빠의 설레고 기분 좋게 상기되어 이야기하는 모습이 두고두고 내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상금 때문에 더 설레어 하신 엄마의 모습도 매우 귀여웠다. 내 인생의 소중한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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