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4] 머지않아 여름은 끝나겠지만
D-304. Sentence
머지않아 여름은 끝나겠지만
느낌의 시작
머지않아 여름이 끝나가겠지만, 나는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에 다시 눈을 떴다. 긴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지만, 연휴라는 이름이 주는 설렘도 잠깐뿐, 오늘의 현실은 여느 토요일과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현장으로 출근했고, 두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집에 남아 있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결국 첫째에게 둘째를 맡긴 채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마음의 흐름
어제 아침, 첫째가 오랜만에 “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없는 솜씨지만 냉장고에서 얼려둔 고기를 꺼내고, 어머님이 담가주신 김치를 꺼내 달걀 프라이와 함께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였다. 음식솜씨도 없고 음식을 할 시간도 없는 엄마이기에 늘 미안하고 작아지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 듯 “맛있다”고 웃어주는 아이들이 그저 고마웠다.
식사를 마치고는 6,70년대 장발 아저씨가 된 듯한 내 머리를 자르러, 어제 부랴부랴 예약해둔 집 앞 미용실을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와 첫째에게 둘째를 맡기고, 동네 스타벅스로 향했다. 해야 할 일들에 순간순간 잠식되는 요즘, 그럴수록 나는 감정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스타벅스에 앉아 자료를 열어 번역하고, 조금씩 읽고 정리하는 일을 반복했다. 어느새 5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손에 남은 건 몇 장 안 되는 PPT뿐이었다. 그 순간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ChatGPT든 Gemini든 어떤 AI 서비스를 쓰더라도, 결국 결과는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 처음엔 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며 결과를 기대하고, 새로움을 꿈꾸지만, 결국 내가 하나하나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건 내 것이 될 수 없고 새로울 수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자료를 출력하고, 번역하고, 하나하나 읽으며 줄을 친다. 누군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언제 그렇게 하고 있냐’며 효율이 떨어지는 행동이라 말하겠지만, 나의 고유한 영역을 AI에게 맡겨버린다면 어떤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안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지금은 흐리멍텅한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언젠가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품고 계속한다.
다시 눈을 떠 씻고 잠자리에 누우려던 순간, 또다시 노트북을 켜 글을 남긴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테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건 후회뿐이라는 걸 나는 안다. 명절에도, 시간 오래 걸리고, AI보다 더 나은 답변을 줄지 보장 없는 자료 읽기를 하고자 한다. 시간 내에 다 할 수 있을지, 가능할지 마음속에서 계속 의문이 들지만, AI가 알려주는 이미 나와 있는 답변들을 몽땅 모아 예쁘게 정리할 생각은 없다.
나는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해나간다. 하다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고 흐릿한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고, 그때가 되면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머지않아 지금처럼 정신없는 상황도 끝나고, 지나가겠지만, 나중에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잠을 청해본다. 오늘도 수고했어, 나.
내 안의 한 줄
효율보다 ‘내 것’을 택하는 느림이, 나를 만든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