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7] 디자이너와 AI과의 관계
D-307. Sentence
디자이너와 AI과의 관계
느낌의 시작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클라이언트와의 중간보고 미팅이 잡혀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처음 결과물을 보여주는 자리다. 연휴 기간 내내 머릿속은 잠시도 쉬지 못했다. 디자인 프로세스와 AI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 논문들을 번역하고, 출력해 밑줄을 긋고, 직접 읽어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논리를 먼저 세우고 목차를 정리해 PPT를 만들며 효율적으로 형태를 잡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AI가 정리해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내 손으로 느리게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마음의 흐름
AI의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빠르다. 정보의 양과 리서치의 효율만 본다면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읽지 않으면, 그건 결코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체감하고 있다. 손으로 밑줄을 긋고, 문장을 따라가며 내 언어로 옮겨적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AI가 대신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관점과 리듬이다.
어제는 친정집에서 돌아와 피곤했지만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남편과 두 아들은 먼저 집으로 보내고, 나는 동네 스타벅스로 향했다. 영업이 끝나기 전까지 출력해놓은 자료를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매장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직원들의 움직임 속에서 내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속을 헤매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 거실에 눕자마자 다시 자료를 펼쳤고, 그러다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시댁으로 출발해야 하는 날이었지만 눈이 먼저 떠졌다. 옆에 두었던 논문을 다시 펼쳤고, 어제부터 잡히지 않던 개념들이 갑자기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A-ha Moment였다. 얕게만 읽고 지나가면 프로젝트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 피상적인 감각이 싫고, 자괴감이 든다. 그러나 계속 보고, 또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흩어져 있던 점들이 이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순간을 만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
짐을 챙기다 떠오른 생각이 날아가버릴까 펜을 들고 급히 논문 여백에 그림을 그리며 생각을 적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시간이다. 만약 내가 계속 AI와 씨름만 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순간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인지 유난히 졸음이 쏟아진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알기에,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다음 스텝을 위한 또 다른 A-ha Moment를 기대하며.
내 안의 한 줄
생각의 속도만큼은 내 것이어야 한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