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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의 하루 4시간전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씨어터쿰)>

“난,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어”

⒞ 극단 이와삼

인간과 사람은 모두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그 어감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이 종족을 구분하는 딱딱함을 내포하고 있다면 ‘사람’에는 정겨움이 흠씬 묻어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람이 먼저 되자’, ‘사람 내음’, ‘내 사람’과 같은 표현이 있겠는가. 어른들은 종종 어린아이들에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묻는다. 그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사람답게 살기’이다. 최근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 고유의 영역이 점차 사라져간다. 기계가 인간을 따라올 수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예술 분야조차 알고리즘 학습을 통해 ‘창작’되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한가운데에서, 인간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인간성을 고민한다.



로봇, 인간과 로봇, 인간과 비인간, 인간, 그리고 다시 인간과 로봇.

로봇과 인간을 소재로 하는 다섯 개 에피소드가 옴니버스로 전개된다. 하나의 서사에 각기 다른 주인공을 내세우는 형식이 아니라 독립된 세계관을 배경으로 설정하는 탓에 단절감과 혼란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무대 위 구조물로, 씬이 전환됨과 동시에 공간 또한 눈앞에서 변화한다. 덕분에 실험실, 집, 연구소와 같은 배경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압축적으로 전달하고자 하기에 발생하는 어려움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무대 뒤 스크린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Ep.1 [지니는 사람] 이타주의를 표현하는 인공 지능 로봇 ‘지니’

⒞ 극단 이와삼

로봇은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말 것, 인간에게 복종할 것, 앞의 두 조건을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스스로 보호할 것. 인간의 명령에 반할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진 로봇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실험체를 동정하는 로봇과 스스럼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 중 어느 쪽이 더 비인간적인 존재인가?

객석을 바라보지 않고 둥글게 마주 앉은 인물들은 표정을 가림으로써 감정을 숨길 수 있다. 잡음과 함께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만이 인물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데, 그 덕분에 마치 실험체가 된 것만 같은 효과를 얻는다. 이타심을 발휘하는 로봇, 로봇을 협박하는 인간, 인간을 무심하게 지켜보는 나, 이곳에서 가장 사람다운 면모를 보이는 자는 누구인가?


Ep.2 [엄마는 메텔] 마인드 업로딩으로 재현된 엄마 로봇의 사랑을 거부하는 ‘수나’

⒞ 극단 이와삼

죽은 엄마를 대신하여 기억을 물려받은 AIR는 따뜻한 밥을 차리고 딸을 걱정하는 등 성실하게 기능한다. 마음의 문을 닫고 반항했던 까닭은 실컷 혼이 나고 싸우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나 AIR는 끝내 애정에서 비롯된 잔소리를 해내지 못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포함한다. 단순한 개체 간 만남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관여하는 경험. 로봇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사람들은 공유하며 산다. 완벽하게 기획된 인위적 산물은 역설적으로 불안정함, 비이상적임을 채울 여지가 없다.


Ep.3 [침팬지와 사람] 기후 위기 티핑포인트 앞에서 신념을 지키는 ‘리언’

⒞ 극단 이와삼

동물의 세계에서도 지도자, 짝짓기, 갈등, 화해와 같이 인간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뒤이어 침팬지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등장시킴으로써 일종의 우화 형식으로 이기적인 기득권의 민낯을 꼬집는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소신껏 행동하는 인물과 거대한 권력 앞에서 좌절하는 인물, 그 숨막히는 대립을 지켜보면서 쉽사리 어느 한쪽의 편에 서지 못한다.

⒞ 극단 이와삼

‘리언’을 어리석다고 비난하거나 반대로 다른 연구원들을 부도덕하게 여길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 정의로움의 딜레마를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선뜻 동조하는 대신 고뇌에 동참한다는 사실일까? 관객들은 선택의 순간에 함께 망설이고 괴로워하면서 한 줌의 인간성을 지켜낸다.


Ep.4 [옛날 연극을 보았다] 친구의 캐스팅 부탁을 거절하면서 또다른 친구에게 자신의 일자리를 구걸하는 ‘강영훈’

⒞ 극단 이와삼

한때 잘나갔던 연출가 ‘강영훈(강 형)’은 오랜 친구이자 무명 배우 ‘김영훈(김 형)’의 오디션 부탁에 단호한 독설로 선을 그으며 번호까지 차단해버린다. 반대로 요즘 잘나가는 작가를 인터뷰하러 가서는 보조 작가라도 시켜달라며 무릎을 꿇는다. 자존심도 없이 집요하게 캐스팅을 구걸하는 김형을 보고 (비)웃던 관객들도 같은 상황에서 입장이 뒤바뀐 강형의 모습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 극단 이와삼

첫 번째 상황에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김 형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면 두 번째 상황에서는 안타까움과 절박함을 체험한다. 같은 흐름, 다른 입장. 대부분 자신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분명 감추고 싶은 장면이 있다. 그런 날 것의 감정을 직면, 더 나아가 긍정하고자 한다. 때로는 잔인하고 비굴한 모습까지도.


Ep.5 [이나, BA] 앵무새 로봇과 함께 남겨진 ‘이나’

⒞ 극단 이와삼

어린 아이의 외로운 생일마다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상대는 하위 구역 사람들의 불만 표출 유전자 제거 기술을 연구하는 아빠도, 그런 상위 구역에 환멸을 느끼고 떠난 엄마도 아닌 앵무새 로봇 BA. 생판 모르는 열 명보다는 내 곁의 한 명이 소중하다는 생각과 동등하게 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한다. 서로 대립하는 의견이지만 ‘이나’에게는 둘 다 사랑하는 부모님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난,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어”

⒞ 극단 이와삼

스토리텔링 전반에 공유되는 연결고리는 등장인물의 상동행동이다. 불안하거나 괴로울 때 손을 털거나 머리를 치는 등 고유한 움직임을 반복하는데, 이것은 마치 고장난 상태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가서야 그들이 바로 ‘사회적 불만 표출 유전자가 제거된’ 하위 구역민임을 깨닫게 된다. 권력의 이해관계대로 좌지우지되는 세계관이 마냥 먼 미래나 허무맹랑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도 유한한 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계급 차별과 저항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기계적인 인간으로 이동하는 4-3-2-5-1 순으로 극이 진행되었더라면 조금 더 수월하게 알아차렸을 것 같기도 하다.

⒞ 극단 이와삼

각 에피소드를 통해 보았다시피 사람 사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모순 덩어리이다. 무정한 인간과 다정한 로봇, (관계가) 완전해지는 조건으로서 (개체의) 불완전함, 평등한 열악함, 태도의 양면성,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희생. 그러나 결국 인간에 대한 혐오보다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려는 세상이다. 인간이든, 사람이든, 로봇이든, 어쨌거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면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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