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이 불러온 집중력의 붕괴
나는 3학년 때 한국의 정신과에서 조울증과 불안장애를 진단받았다. 그 병원에서 처방한 오르필을 복용하면 감정이 둔탁하게 느껴졌다. 불안, 우울은 물론이고 뿌듯함, 활기참 같은 감정까지 다. 전보다 게을러진 느낌도 들었다. 그때의 나는 과제로 나온 어려운 문제를 오래 고민해보지도 않고 금방 포기해 버렸다. 병원에서는 그 게으름도 강박증이 치료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학점이 떨어지는 게 내 잘못이 아니고 치료로 인한 거라니, 거기다 곧 나아질 거라니!' 심리적으로 지친 내 입장에서는 너무 매력적인 설명이었다. 지금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도 치료는 잘 되어가는 중일 거라고 덜컥 믿어버렸다. 너무 믿어버린 나머지, 의사가 상담 때마다 집요하게 포교활동을 하는 것도 '그럴 수 있지' 하면서 흐린 눈 해버렸다.
한국에서 계속 조울증 치료를 받다가, 2021년 9월에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약 복용 전에 의욕이 넘쳤던 내가, 하필이면 영국에서도 손꼽히게 악명 높은 수리물리학 석사과정을 선택해 놨다. 입학했더니 주변에 전공 덕후들 밖에 없었다. 나는 과제로 증명하라고 한 '2차원 구' 문제도 겨우 풀었는데, 다른 학생들은 문제 풀이 튜토리얼 수업에서 'n-차원으로 일반화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다면서 교수님께 질문했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섞이고 싶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우울한 감정이 들수록 약 복용량을 늘렸다. 학기 말엔 집중력이 아예 바닥나서, 단기기억 상실증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한창 수식을 전개하다 보면, 무엇을 증명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다. 한참을 올라가 문제를 다시 이해하고 멈춘 부분으로 돌아오면, 무슨 과정을 거쳐서 이 중간 과정까지 도달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분명 몇 분 전의 내가 쓴 식인데도 생소했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과제로 주어진 문제는 그나마 나았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면서 천천히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다. 시험 중에는 그럴 수 없었다. A4용지 한 바닥에 걸쳐 어떤 물리량을 구하고 나니까, 내가 앞장에 써둔 수식의 어느 부분에 이 값을 대입하려고 했던 건지 헷갈렸다. 다시 하나하나 따져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당장 보기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데 대입하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때 내가 문제를 푸는 모습은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그전에는, 기억도 없으면서 주인공이 본인 손글씨로 적인 메모 하나 믿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막상 내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니 알 것 같았다. '기억이 안 나면 선택지도 없구나.'
그때까지도 복용 중인 약이 문제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계속 최대치를 복용했다. 2022년 1월, 겨울방학 중에는 활력이 너무 떨어져서 하루에 잠을 14시간씩 자게 되었다. 비로소 휴학을 결심했다. 그래서 원래는 9개월이던 석사과정을 약 2년 동안 다니게 되었다. 엄마는 힘들게 진학한 학교에 두 배 길게 소속되어 있을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니냐고 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다른 정신과를 방문했다. 새로운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충격이었다. 일단 나는 조울증이 아니었다. 게다가 2년간 복용한 오르필은 증상을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었다. 첫 병원에서 진행했던 검사 결과지를 다시 살펴보니, 2020년의 나는 활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었다. 그런데도 첫 의사는 조울증으로 오진했고, 그렇지 않아도 낮은 에너지를 더 떨어뜨리는 약을 처방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처음에 갔던 병원이 원래 조울증 진단을 자주 내리는 곳이라고 한다. 다행히 새로 처방받은 약은 내 증상을 빠르게 개선시켜 주었다. 휴학하는 동안 심리상담도 병행하여 정서가 많이 안정되었고, 그 해 가을에 복학해 무사히 석사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