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긴 시그니처

연구실에서 양자장론으로 존재하기

by 수지

LHC 현상론 랩 인턴 3달 차.

절대 관측되지 않던 중력자에서, 이제는 전자기장으로 진화했다.

평소에는 필드 모드로 조용히 배경에 깔려 있다가, 주변 사람들과 상호작용이 꼭 필요할 때만 잠시 입자로 응집한다.


물론 글루온 교수님이나 쿼크 박사과정생들처럼 사방팔방으로 강하게 얽히는 일은 없다.

애초에 색전하가 없으니, 바로 옆에서 강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도 나는 배경처럼 자연스럽게 통과시켜 줄 뿐이다.

그래도 이젠 표준모형 안에 안정적으로 포함된 입자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랩의 구성원'으로 인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입자가속기의 주요 상호작용에선 한 발 떨어져 있지만, 최소한 '관측이 불가능하던 시절'보다는 나아졌다.

가끔은 나도 의도치 않은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공식적인 랩 인턴 기간이 끝나서 글루온 교수님께 성적을 부탁드린 날의 일이었다.

교수님은 미리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며, 요즘 펀딩 신청으로 정신이 없다고 하셨다.

"학생일 때나, 교수가 되고 나서나 늘 '조별 과제'는 소수의 몫이지..."

그 한탄과 함께 다른 교수들이 얼마나 행정을 못하는지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사회성 필터가 갑자기 잠시 꺼졌다.

"뭐.... 인간들이 원래 다 그렇죠..."

... 멈칫.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방출한 거지?

늦었다. 이미 검출기에 시그니처를 남긴 뒤였다.

식은땀이 났다.

"그래!! 내 생각에 게으름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아!!"

... 다행히, 내 미약한 전자기력 시그널은 글루온 교수님의 강한 핵력 시그널 앞에 다시 노이즈로 흩어졌다.



또 다른 일도 있다.

노가다에 가까운 실험을 전부 돌려내고, 드디어 실험 다운 실험을 시작하던 날이었다.

슈퍼바이저 포닥은 레포지토리 구석, 눈에 잘 띄지 않게 구현된 모델을 하나 소개하며 말했다.

“... 아무튼, 이 아이디어는 탐구해 볼 여지가 무궁무진해.”

번역하면 이렇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내 언어로는 달랐다. ‘드디어 내 아이디어를 끼워 넣을 여지가 생겼다.’

최대한 시그널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들뜬 파동은 슬슬 양자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나는 신난 마음으로 공유 문서에 한 페이지 분량의 수식을 쏟아내고 퇴근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흥분은 빠르게 식고,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깊이 없는 지식으로 너무 나댄 건 아닐까?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아닐까?’

결국 새벽에 일어나, 누가 보기 전에 수식들을 전부 삭제하고 건조한 문장 두 개만 남겼다.

그리하여 내 수식들은 본문에선 사라진 채, 오직 수정 히스토리에만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마치, 최종 상태에는 검출되지 않지만, 확률 진폭의 어딘가를 파헤치면 존재를 드러내는 가상입자처럼.



학회 직전, 논문 데드라인을 맞추느라 분주히 상호작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저 양자색역학 같은 혼돈의 일원이 되어, 연구실에서 확실한 시그니쳐를 남기고 싶은 걸까.

아니면, 아무도 관측하지 못하던 중력장 상태가 그리운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래 양자색역학에서는, 관측되지도 않는 "가상입자"들이 확률 진폭 계산을 좌우한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 존재도 점점 주변 사람들의 관측기에 포착되고 있었다.